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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인포레스트 Nov 21. 2024

만 스물둘의 단상

사랑의 다른 말

  재원이 이모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의 나의 모습만 기억하고 계신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 기억 상 초등학교 이후로는 이모를 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이모에게는 '재원'이라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이모의 아들과 놀이터에서 놀거나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주변을 누가 더 빨리 한 바퀴 돌고 오는지 내기를 하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간혹 엄마가 일이 있어 어린 나를 혼자 집에 둬야 할 상황에는 재원이 이모집에 나를 잠시 맡기고 가신 적도 더러 있었다. 이모의 집에서 '재원'과 하루 종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웃고 떠들고 장난감 가지고 장난치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놀던 날에 이모는 간식과 먹을 것을 주며 엄마가 올 때까지 놀이에 온 열정을 바치는 어린아이의 즐거움과 희열의 옆에서 지지대처럼 지켜봐 주시곤 했다.

  그런 재원이 이모는 5년 전, 오랜 암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이모가 돌아가셨던 그날에 지인들과 함께 국내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를 통해 이모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뺨을 가르기 위해 유독 애를 쓰던 흐리멍덩한 겨울 하늘 때문인지, 보통의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 그 자체의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모의 죽음은 참 현실감 없이 다가왔다. 모호한 현실감은 감정의 경계를 더욱 흐릿하게 만들었다. 재원이 이모, 오늘 돌아가셨어, 엄마의 카톡 문자에 얼어붙은 추위와 허망한 마음이 뒤섞인 묘한 심란함이 더운 속을 감쌌다. 그 어떤 단어를 집어넣어도 잡아당길 중력이 없는 진공 상태라고나 할까. 단순히 슬프다, 충격적이다 같은 말로빈 허공과 비슷해진 속사정을 푹 안아주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우리가 매끄러운 단순 직선의 표현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있었는지 그 빈도의 실체만 여실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이모의 죽음과 이어지는 슬픈 심정을 포용할 적절한 단어를 짚어보려 했던 나는, 결국 엄마한테 조차도 꺼내 보이지 못하고는 그저 ‘돌아가셨구나’, 그 한 마디만 힘없이 떨궜던 기억이 난다. 슬픔에 잠겨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로 떠나보낸 이모, 그녀를 떠올리게 된 건 돌아가시고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모의 모습은 그을음이 내려앉은 그림자 그 자체였다. 사진을 보게 된다 한들 이모의 얼굴이 다시 알아볼 수 있을 지도 자신이 없을 만큼 어두운 장막이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이모를 본 시점이 언제인지, 얼굴과 체형, 그리고 체구를 비롯한 전반적인 스타일까지, 한 사람의 외형이 이렇게 신기하리만치 떠오르지 않는 이 기막힌 생소함에서 비롯된 낯섦이 참 이상했다. 순간 이모에 대한 웬만한 기억이 사라져 버렸음을, 여남은 기억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사실이 명징해졌음이 가슴을 치고 갔다. 이미 9할 이상은 심연의 구멍 속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번져버린 지 오래다. 경험이 모든 기억을 대변해 주지 않음을 실감하고야 말았다. 이대로 시간이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나 버리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 글은 어쩌면 여남은 기억과 함께 카오스로 빨려 들어가서는 결국 쓰지 못하게 될 글로 전락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흔적은 목소리다. 목소리만 남은 사람. 당시의 이모의 나이와 가까워져 가는 지금의 나에게 이모는 그런 사람이다. 사라져 버린 얼굴을 목소리로 짐작하여 그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현재로서 내가 이모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모의 목소리에는 늘 들뜨지 않는 차분한 구석이 있었고, 나긋나긋한 부드러움에 인내가 배어 있었다. 이모는 같이 놀다 사고를 치는 나와 자신의 아들을 향해서 단 한 번도 소리를 지르신 적이 없으셨다. 여름에 자주 놀러 갔던 졸졸 흐르는 얕은 계곡 연상케 했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그 어른 나이에도 행동이나 눈빛에도 특별한 조급함이 보이지 않는 전반적으로 조용한 성격을 지닌 분이었음을 확신했다.

  목소리 하나로 어둑한 장막에 가려졌던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의 형체에서 손과 발과 움직임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참 드물고도 신기한 일이다. 이모의 잔잔하고도 나긋한 목소리와 더불어 유일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얼굴은 여전히 깜깜하지만 목소리와 행동이 연결된 유일한 장면, 이 장면은 어쩌면 나만 기억하는 이모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추측 건데 여름이었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재원'과 놀기 위해 우리 집보다 고층에 있던 재원의 집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던 어린 나는 현관문 옆에 붙어있던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키가 작아 이모의 집 안에 있는 인터폰 화면에서 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모가 나인걸 어떻게 아시고 문을 열어주셨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문을 여시 고는 어..? 재원이 자는데, 이모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망설임과 난처한 기색을 아주 살짝 내비치면서도 아파트복도에 가만히 서있던 나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어쩌다 보니 재원의 집안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내가 있었고, 잠을 자는 자신의 아들이 있는 침대방을 향해 느린 발걸음으로 들어가시는 이모의 뒷모습이 있었다. 이모를 따라 침대방으로 자그마한 걸음을 옮기면서 작은 거실 전체를 드리우던 환한 햇볕과 베란다 미닫이문 앞 뒤에 있던 다용도 나무 선반대에 쌓여있는 로봇이며, 레고를 비롯한 장난감통 위로 흰 빛이 아른아른 반짝이던 장면을 선선히 지나쳤다.

  그때 재원은 침대방에서 엎드려 곤히 자고 있었다. 잘못된 타이밍에 찾아왔나 싶게 무안할 정도로 너무 깊이 자고 있는 재원을, 이모 역시도 어떻게 깨우기가 난감하셨던 모양이다. 이모는 나에게 "우리 조금 기다려 보자" 이 말씀만 하셨다. 만약 이모의 목소리가 봄이라면 산들바람이었을 테고, 겨울이었다면 눈송이, 여름이라면 느리게 내려앉는 연주황빛 노을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가을이라면 적당히 선선한 바람에 사뿐히 고개를 떨구는 은행잎이지 않았을까. 당신의 아들이 뭐 하다 잠들었는지, 나중에 찾아오는 게 좋다거나, 오늘은 못 놀 것 같다는 이런저런 긴 설명 대신에 기다림을 권했던 이모의 대답은 작고 어린 속에 조용히 스며든 신선한 울림이었다.

  나는 이모의 말을 따라 광활하게 보이는 거실과 작은 방 사이를 왔다 갔다 거리며 재원이 잠에서 일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재원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 안 인기척에 당연히 반응하고는 일어날 것이라 짐작했던 이모는 재원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그때 이모의 왼손에는 지역 홍보물이 인쇄된 둥근 부채가 손에 들려있었다. 이모는 침대 위에 앉아 오른팔을 괴어 상체를 지지한 채로 부채를 든 왼손으로 당신의 아들 머리맡을 살랑살랑 부채질을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이어졌던 이모의 부채질에 잠자는 재원의 앞머리가 살짝씩 들썩였는데, 쓰다듬는 부드러운 바람에 되려 재원은 잠에 더 깊이 빠진 것 같았다. 그 은은한 고요함에 얼어붙은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문지방 바로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알았는지도 모른다. 아스라이 빛이 번진 파편의 윤곽이 더 미세한 단위의 파편이 되어 흩어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깊이 형성된 꿈의 잔잔한 파장을 급작스레 흔들어서 깨우지 않고 견고한 정적으로 기다려주는 손짓이었다. 그 손짓에는 떠미는 힘도 끌어당기는 힘도 없었다. 서로 간을 지탱하는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기다림만 있었을 뿐. 기다림을 입은 사랑의 다른 말만 일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신의 아들에게도 잠자는 아들을 찾는 이 앞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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