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도(晩學徒) Z 씨의 오전
Z 씨는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느지막이 대학교에 입학했다. 생애 두 번째 대학교 생활을 앞둔 그녀는 개강 일주일 전에 택시를 타고 한 학기 동안 머물 대학교 내 기숙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며 찬 공기를 폐 깊숙이 씁- 들이켠 그녀는 짐가방을 꺼내는 팔의 움직임에 따라 코와 입을 번갈아 가며 묵직하고 허연 입김을 쏟아냈다. 몸이 가벼워진 택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담히 떠나가자 Z 씨는 짐과 찬바람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기숙사 입실 시간에 맞춰 생활관 건물 앞에 도착한 건 분명하거늘 주변에 몇 개의 건물들이 더 있는 바람에 막상 안으로 들어가려니 이곳이 기숙사가 맞는 건지 순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보통 학생들 같았으면 일찍이 핸드폰으로 위치와 건물의 생김새까지,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정보에 대한 검색을 마치고는 당당히 안으로 들어가서 일사불란하게 짐정리를 시작하고도 남았겠지만, Z 씨는 일다경 동안 하얀 건물 외벽을 이런저런 눈짓으로 기웃거리기만 하다가 자신이 찾고 있는 답이 마치 저 건물의 높은 곳에 숨어있는 듯 고개를 들어 홉뜬 눈으로 하늘과 옥상의 경계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2월 말이지만 아직 1월의 혹한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련 가득한 날씨는 혹독했다. 캐리어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손을 한기가 갉작거리며 덮치고 있었으나, 크게 느끼지 못해 무감각해진 손의 감각을 뒤늦게 알아챈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찰나의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오른손에 있던 커다란 짐가방을 왼손에 쥐고 있던 캐리어 가방의 손잡이 위로 옮겼다. 날이 추우니 짧은 시간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몸을 움직이려니 한기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허리를 숙이고는 이제 자신의 몸처럼 무거워진 짐을 드는 그녀의 손등 위로 말간 콧물 방울이 툭 떨어졌다. 지금 이 상태로 짐정리까지 한다면 필시 몸살이 생길 것은 안 보고도 뻔한 일임을 그녀는 직감했다. 도착한 장소에 대한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당장 아플 자신에 대한 확신만 가득한 스스로가 한심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자조적인 생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축축 처지는 발걸음으로 질질 짐을 끌며 묵묵히 연회색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중반쯤에 도달했을 즈음 Z 씨 앞으로 자박자박 희미한 발소리를 내며 누군가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무거운 짐과 한기와 계속 씨름을 하느라 여태 땅바닥만 보고 있던 그녀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단발을 흔들거리면서 자신의 옆을 빠르게 스치는 인기척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드는 시간에 그 누군가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 버리고 난 뒤라 어떻게 목청껏 부를 새도 없었다. '여기가 학생 기숙사가 맞나요? 사무실에 들러서 방 호실을 물어봐야 하는데, 사무실은 어디에 있나요?' 채 던지지 못한 질문이 허공을 떠다녔다. 이미 홀연히 사라져 버린 누군가의 뒤통수가 Z 씨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순간 Z 씨는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약 40년 전 대학 생활을 하며 가졌던 푸릇하면서 서글픈 낭만과는 다른,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을 닮은 이상한 괴리감 같은 것이었다. 건물 입구까지 절반의 계단이 남았지만, 또 그녀는 1분여의 시간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냉혹함이라고 생각하면 과한 표현인 것 같고, 서울에서만 볼 법한 삭막함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이곳까지 전염되었다고 봐야 하는 걸까. 그렇게 고뇌하는 사이 한심스러운 마음 옆에는 어느새 작은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앞으로 마주해야 할 하얀 외벽과 같은 불확실한 그 무엇에 관한 새로운 낯섦이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불안 속에는 노화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눈의 사정을 고려하여 크게 키운 핸드폰 글씨체가 혼잡스럽게 떠다니고 있었고, 둔한 손가락으로 느리게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하는 자신이 있었으며, 서투른 검색능력과 함께 전화나 직접 물어보며 찾는 것이 편한 세대의 그 모든 경험의 대비가 명징하게 알몸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제는 또래들이 아닌 딸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는 앞으로의 상황에서 과거가 아무짝에 쓸모없음이 여실히 증명됨에 그녀는 초라함을 느끼는 수준에 이르고야 말았다. 쌓은 것들이 무색하게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뿌리까지는 투명해지지 않았으리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나직이 읊조리며 마지막 남은 계단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칠게 숨을 헉헉 몰며 한기를 얹은 어깨 부근을 언 손으로 툴툴 털어내며 일단 뭐가 되었든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은 생각에 Z 씨는 캐리어를 끌고 안내판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을 지나던 그녀는 계단 위에서부터 방금 밖에서 들었던 발소리와 비슷한 인기척을 느꼈다. 그 순간 발개진 두 뺨과 미처 풀리지 않은 언 몸을 계단을 향해 휙 돌리고는 뭔가 꽂힌 듯 주의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리라 올려보고 있던 계단과 벽 사이로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학생이 스마트폰에 시선을 박은 채로 내려오고 있었다. Z 씨의 얼굴에 드디어 차가웠던 근심이 부스러기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2개~3개의 계단을 남겨놓은 시점에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고 얼굴을 든 여학생과 Z 씨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자신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모습을 Z 씨가 빤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인지한 여학생은 순간 흠칫 뒤로 뒷걸음질하며 어깨가 튀듯 들썩였다. 택시에서 내려 뒤 여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Z 씨는 마른입을 열어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여학생한테 물었다. "학생,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만 물어볼게요. 여기가 학생 기숙사가 맞나요? 내가 여기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데, 사무실 위치만 좀 알려 줄래요?" 여학생은 벙벙한 표정이면서도 밝고 단정한 목소리로 “아, 이 건물하고 뒤쪽에 학생 식당이 있는 건물까지 전부 기숙사예요. 사무실은 바로 뒤쪽 건물에 있는데, 여기 오르막길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되세요.” 여학생은 말을 하고 나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Z 씨의 표정을 진한 갈색 눈동자로 훑고는, 단순 설명만으로는 전달에 한계가 있을 걸 알았는지 Z 씨를 데리고 건물 밖까지 나와서 사무실로 향하는 길까지 일일이 알려줬다. 덕분에 방금까지 적응되지 않고 앙금 비슷하게 남아있던 무심함은 이 여학생의 적극적인 설명에 희석되어 사라질 수 있었다.
그녀는 여학생의 친절한 설명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얼굴을 보고 의도치 않게 놀라게 한 점에 대해서 다시 차분하게 미안함을 표했다. 그리고는 여학생을 보며 “우리 다음에 언제 만나서 식사 같이해요. 점심이나, 저녁? 먹고 싶은 거 편하게...... 그, 그 문자로 먼저 말해줘요. 내가 특별한 일정만 없으면 다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말해줘요. 시간 맞춰서 같이 가게.” 여학생은 살짝 놀라면서도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않은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Z 씨의 말에 그러겠다는 답을 했다. 그렇게 Z 씨와 여학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대학에서의 첫 인연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