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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글 Mar 26. 2020

맥북 프로 침수와 오토바이로 돌아가는 길



며칠 전 라이트룸 클래스 진행을 위해 한 시간 일찍 약속 장소로 갔다. 날씨는 맑고 오토바이 울프 클래식을 타기 좋았다. 약간의 바람은 여유를 느끼는 데 필요한 필수조건 같았다. 클래스 시작 10분 전, 이리저리 자리를 정리하는 데 맥북 프로 위에 커피를 쏟았다. 주먹만 한 넓이로 커피가 맥북에 퍼졌다. 재빠르게 거꾸로 들었지만 방향키 부분에서 커피 물이 나온다

키보드에 커피 물이 안 나올 때까지 바람을 불어내고 전원을 껐다 켜보기로 했다. 재 부팅이 됐다. 라이트룸 클래스 진행에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수강생이 오고 10분쯤 클래스를 진행하니 갑자기 맥북이 안 된다. 뭔가 버벅거리고 화면이 멈추기 시작했다. 재 부팅을 시도했지만 화면이 다시 켜지지 않고 파일 모양에 물음표가 깜빡거리기만 했다. 아 망했다





다행히 수강생이 자기 화면을 보고 천천히 해도 된다며 배려해 줬지만 그게 참 미안했다. 결국 맥북은 센터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일을 마치고 오토바이 울프 클래식과 함께 사설 업체를 찾았다. 원래 애플 정식 서비스센터에 가야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하니 침수로 인한 교체 비용이 50~60 정도가 든단다. 하지만 나는 저렴한 사설로 갈 수밖에. 사설업체는 광주 충장로 문화전당 쪽 골목에 위치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장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는 젊은 남자가 마스크를 쓴 채 나를 맞았다. 이리저리 문제를 말하니 세척 후 재 부팅 시 문제를 알 수 있단다. 1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에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10분도 안 돼서 전화가 왔다. 메인보드를 수리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대로 진행해 달라 말하면서도 괜히 실력을 의심하게 된다. 수리 후에도 발견될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식 서비스센터보다는 비용이 절반이니 위안을 삼아 본다. 조금은 애석한 마음으로 오토바이 울프 클래식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돌아가는 길, 정식 서비스센터와 사설 업체 가격을 고민하고 의심하던 나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돈이 넉넉했다면 이런 고민과 의심 없이 쿨하게 어디든 맡겼을 텐데. 그러고 보니 옷이나 신발을 살 때, 친구들을 만날 때, 여행을 갈 때도 똑같았다




합리적인 소비란 명목으로 쿨한 행동보다는 억압과 절제로 나를 가뒀다. 작은 울타리 속에 갇힌 것이다. 좋은 소비는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울타리 속에 갇혀만 있다면 새로운 세상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할 것이고 스스로 경험으로 부딪혀 이뤄낼 성장 가능성을 낮추고 말 것이다. 물론 좋은 소비를 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적절히 또는 많은 수입이 있을 때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꼭 많은 수입만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소비에 움츠린 채 주저하고 후회하는 내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일로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인다

“돈을 벌자, 다만 돈에 지지 말자, 더 나은 나를 위해 움츠리지 말자”

늦은 밤 오토바이 울프 클래식을 타고 돌아가는 시간, 발광하는 빛들 사이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보인다. 곧 사라질 것이지만 다시 내일 떠오를 것을 생각하니 인생은 지고 뜨며 새로운 내가 된다는 걸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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