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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Nov 22. 2018

여행, 9개월 차.

좋은 여행자는 좋은 여행을 한다.


결국 1년을 다 채워간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여행을 끝낼 거라고 별 생각 없이 말하고 다니긴 했는데, 정말로 올해 말이 되었고 나는 아직도 여행 중이다. 통장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얼마전에 카드를 잃어버려서 친구한테 돈을 다 맡겨놨더니. 월급도 받아야 하는데 받을 계좌가 없어서 의도치 않게 자발적으로 월급 받기를 미루고 있다. 

여행하는 삶이라니, 부럽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저 삶이죠."라고 대답한다. 여행 초반에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던것 같다. 어, 너무 좋아. 매일 바다도 보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지금도 매일 바다를 보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하고 싶은 일만 하지만, 여행이 장기로 넘어가면서 이런 삶에 대한 갈망이 사라짐과 함께 특별함도 줄었다. 지금의 내게 여행이 주는 특별함이란 그저 볕 좋은 날 바다 속을 투영하는 물 그림자,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삐져나온 금색 햇빛, 어젯 밤 얼려놓은 파파야의 이빨 시린 당도, 집 가는 길 가방을 가득 채운 온갖 야채들의 덜그럭거림에서 오는 행복이다. 일상의 특별함과 다르지 않다. 
아, 새로운 일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울 때는 특별함이 급상승하긴 한다.

여행이 삶이 된 만큼 여행하는 나날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변했다. 처음에는 내 개인의 즐겁고 행복한 나날들을 위해 애썼다면, 요즘에는 내 삶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위해 고민한다. 내가 스쳐지나간 국가의 사회, 경제, 생태계, 내가 그들에게 끼칠 영향력.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면, 내가 로컬 사회에 미친 영향력, 로컬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 로컬들과의 직접적 교류로 주고 받는 것, 비거니즘의 실천, 플라스틱 사용량 같은 것들. 

결국 전에는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날이 갈수록 '좋은 여행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기억에 남되 발자취는 남기지 않는 좋은 여행자. 좋은 여행은 좋은 여행자가 됨으로서 완성된다. 

내가 좋은 여행자가 되기로 한 건 단순한 이유에서다.

눈을 감고 당신이 가장 평온할 수 있는 공간을 떠올려보라. 나는 몬테네그로 시골 마을의 전나무숲을 떠올린다. 빽빽히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점점이 퍼진 햇빛과 무수히 갈라지고 합체되는 산들바람이 있는 곳. 그 곳을 떠날 때는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하게 사랑한다고, 눈으로 입으로 키스를 보내며 걸었다. 사랑하는 공간-물리적인 공간이 아닐 수도 있다.- 을 떠올렸을 때, 당신이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총체적인 감정 외에, 그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성하는 요소들 말이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 당신이 그 대상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을 정의할 순 없지만, 그 대상이 당신으로 하여금 망가져도 괜찮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곳, 사랑하는 사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좋은 여행자가 되기로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견하고, 사랑으로 지키고, 다시 떠나는 것이 좋은 여행이다. 좋은 여행자의 좋은 여행.

즐거운 여행에서 좋은 여행으로 변해가는 나의 9개월을 여과없이 보인다. 그리고 10개월, 11개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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