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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n 24. 2019

올드타운 속 하얀 돌집, Turi

2019.06.21


아침 내내 숙소 옮기는 일로 스트레스 받다가, 결국 두시간만에 숙소를 정했다. 1박에 인당 무려 34000원짜리. 아마 내 유럽여행 중 가장 호화로운 가격이 아닐까? (작년에 유럽을 3개월 여행할 때는 보통 만원 이하, 카우치서핑이나 친구네 집, 숙식 노동 등으로 공짜로 잤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올드타운 내 특유의 하얀 돌집에서 꼭 살아보고 싶었다. 결국 에어비앤비를 한참 뒤지다가 정한 곳이 정말 작은 내륙 마을의 작은 3층짜리 이탈리아식 돌집이다. 오는 길에 카페에서 크로아상과 소이라떼를, 그리고 기차로 한시간, 작은 마을(도시라고 하기엔 마을에 가까운것 같다) turi에 도착했다.


기대했던 만큼 예쁘다. 작고 하얀 집들이 오밀조밀, 불규칙하게 각각 다른 모습의 나무 문들, 작은 창으로 보이는 하얀 레이스 커튼.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매끈한 돌 바닥. 2시를 약간 넘겨 도착했더니 가게는 모두 문을 닫고 사람도 차도 없다. 이 인간들 자는구만, 또 부러워하면서 웃었다.

집에 도착하자 키가 작고 단발머리를 가지런히 귀 뒤로 넘긴 노인이 바쁘게 걸어와 문을 열어준다. 우리가 이탈리아어를 못 한단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더 폭풍같이 이탈리아어를 뱉어내기 시작하신다. 그 와중에 스페인어와 비슷한 일부 단어들을 내가 주워듣기 시작하고, 스페인어로 필요한 몇개 단어를 말하니 얼추 의사소통이 된다. 한 단어씩 알아들을 때마다 신나게 서로를 칭찬했다. 결국엔 번역기의 힘을 약간 빌리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한참 필요한 대화를 나누고 이 시간에도(낮잠 시간에도) 열려있는 슈퍼마켓 가는 길목까지 우릴 데려다주셨다. 그 노인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인사를 하며 끌어안았는데, 맞다, 여긴 볼뽀뽀를 하지. 내가 뽀뽀 타이밍을 놓쳐서 노인분의 뽀뽀만 받았다. 마음이 참 몽글몽글 따뜻했다. 이탈리아의 햇빛 아래서.


그렇게 마트를 찾아갔는데 또 웬걸, 이 작은 마을의 외곽에 덜렁 있는 마트가 무슨 코스트코 크기의 창고형 마트다. 여기 자동차라도 파는거 아니냐며 농담을 하며 들어갔는데 또 웬걸, 유기농 두유 종류만 해도 5가지가 넘는다. 우린 지금까지 뭘 한거지? 게다가 지금까지 마트에서 찾지 못했던 비건 식품들이 엄청 많은거다. 비건 만두, 너겟, ‘미트볼’, 냉동 피자, 요거트, 물론 아이스크림, 기타등등. 어제부터 영이가 아파서 나도 텐션을 좀 조절해야 하는데 너무 신나서 영이가 좀 힘들어했다. 미안.

집에 와서 어제 사놓은 불닭볶음면을 끓이고 만두를 쪘다(식사가 응급했다). 집 1층은 거실, 2층은 침실, 3층은 부엌과 테라스인데 채광도, 바람도 완벽한데다 돌집 특성상 약간 동굴처럼 시원하다. 게다가 부엌은 없는 조리도구가 없어서 (거대한 오븐도 있다.) 이틀동안 집에서 요리만 해도 신날것 같다. 맞다, 여긴 체리가 유명한 곳이라 체리랑 파이 크러스트지를 사와서 체리 파이를 구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만 다 쓰고 나면 파이 크러스트지를 사와야지. 바닐라맛 두유도 사다가 커스터드 크림을 만들면 완벽할 것 같다.

테라스의 파란 철제 의자에 옷을 다 벗고 앉아 밀린 일기를 4일치나 썼다. 키가 고만고만한 하얀 옥상들 뿐이라 남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아도 좋아.



2019.06.21 (2)

전날 일기를 오후 6시에 썼더니 하루의 마무리까지 쓰질 못했다. 일기를 쓰고, 체리 파이 재료를 사러 나갔는데 동네가 또 북적북적. 어딜 가든 6시 전엔 조용하다가 6시가 넘으면 북적해진다. 귀여움 포인트는 광장, 도로, 골목골목 앉아서 대화하는 사람들. 카페에서 모이기보단 그냥 길거리에 의자 놓고 모여 앉아 대화한다. 올드타운 구석구석을 걷다 보면 작고 불규칙한 집 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심지어 아예 집 구조 자체가 집 현관 옆에 시멘트로 만든 의자가 붙어있기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 많지 않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범위로 말이 많다.  


체리 파이 재료는 못샀다. 야채만 잔뜩 사서 들어와 뇨끼와 야채, 콩단백 볼을 로제 소스에 볶은 요리를 했다. 부엌과 연결된 옥상 테라스에서 나는 먹다 남은 화이트 와인, 아픈 영이는 두유를 곁들여서 저녁식사. 하얀 올드타운 집 옥상들이 제멋대로 뻗은 배경에 옥상의 은은한 주황색 조명 때문에 연극 세트장에 있는 것 같았다. 밥을 먹고 간만에 쉐도우 복싱 트레이닝을 했는데 영이는 그게 웃기다며 삼십분 내내 구경하며 웃었다. 여행의 슬픔은 제일 좋아하는 복싱장에 가지 못한다는거.


집 앞 광장의 바에서 핑크플로이드 커버 밴드가 공연을 한단다. 그냥 지나다 봤다. 핑크플로이드 팬은 아닌데, 어쨌든 한때의 락키드로서, 게다가 올드타운 내에서 야외 풀 밴드셋팅 공연이라니, 이건 놓칠 수가 없지. 영이는 아파서 자고 나는 혼자 나갔다. 사실 집에서도 너무 잘 들려서 안나가도 될 것 같았는데, 그래도 밴드 공연은 현장감이지.



이 동네는 하도 작고 관광지도 전혀 아니라서 아시안-게다가 한명은 반 핑크머리에 뒷머리를 밀고, 한명은 삭발에 무지개색, 둘다 대놓고 노브라, 문신, 눈썹 피어싱, 기타등등-의 등장에 다들 놀라움을 대놓고 표현했는데, 그래서 혼자 공연보러 나가는게 조금 신경쓰였다. 공연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은데 괜히 시선이 나한테로 오는 것 같고. 아무튼 잘 즐겼다. 옛날에 핑크플로이드 입문하려고 할 땐 그렇게 별로더니 이번엔 그렇게나 좋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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