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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n 24. 2019

하얀 절벽과 건물이 품은 바다, Polignano

2019.06.20



시차 적응이 안돼서 6시쯤 일어나버렸다. 오늘은 아침 일찍 장봐다 도시락 싸서 근처 해안가 마을인 폴리냐뇨에 가기로 해서 침대에서 뒹굴다 8시 반에 진짜로 일어나 장보러 갔다. 슈퍼마켓 도착하자마자 아이스크림 코너에 비건 아이스크림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있어! 찾을 때마다 환호성. 한국에선 비건 아이스크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해외 나올때 마다 의식 치르듯 비건 아이스크림부터 찾는다) 간만에 야채 섭취 하고 싶다고 야채를 잔뜩 샀다. 밀가루에 아주... 질려버려... 여기 사람들은 무슨 밀가루만 먹고 사는 것 같다. 피자, 파스타, 크로아상 같은 것들을 주식으로 먹는데 항상 토핑이 거의 없다. 즉, 밀가루. 처음엔 어디서든 비건 크로아상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는데 아침마다 크로아상 먹고, 점심에 밀가루 파스타 먹고 하다보면 내가 뭘 먹고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며 결론은 밀가루로 종결...



집에 돌아가자마자 요리하고 나갈 준비 해서 소풍을 떠나는게 우리의 원대한 목표였는데 일단 요리하는데 한시간 반이 걸렸다. 이미 늦은거 천천히 하자며 아침부터 야채볶음에 어제 산 비건 오가닉 와인까지 곁들이고, 결국 침대에 누워 ‘언젠간 나가겠지... 여긴 해도 늦게 지니까...’ 라고 웅얼댔다. 어쨌든 여행자가 가장 행복할 때는 아침술, 낮술 할때. 나는 이걸 ‘한가방가’하다고 한다. 한가방가 행복한 여행자의 삶.


결국 두시 반까지 누워있다가, 옮길 숙소도 찾다가, 출국 전에 들어온 인터뷰도 정리하고... 어쩌구 저쩌구 게으름 피웠다. 결국 두시. 영이는 나가기 귀찮아하는 눈치였지만 대단한 의지로 어떻게 잘 끌고 나왔다. 바리에서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기차를  30분 타고, 도착하자마자 젤라또 하나 먹고(랜덤 젤라또집에서도 과일맛이랑 초코맛까지는 종종 비건- 3덩어리에 2.5유로!) 귀여운 남직원이 있는 포카치아 집에서 말도 안 되게 맛없는 포카치아와 맥주도 사먹고, 해변으로 직행. 근데 세상에, 해변이 아찔하도록 아름다웠다. 내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해변이다. 바닥이 다 보이는 파란 바다를 둘러싼 하얀 절벽과, 절벽 위 아슬하게 놓인 하얀 남부 이탈리아식 돌집들. 하루도 비가 오거나 구름조차 끼지 않는 이탈리아 남부의 완벽한 햇살과 그럼에도 30도 초반 이상으로는 넘어가지 않는 기온,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 이탈리아. 당신은 완벽해.  


참고로 이 해변은 깎아지른 해안절벽을 양쪽에 끼고 사이에 작은 해변이 있어 유명한 곳이다. 로컬 관광지랄까? 들리는 언어를 봐서 외국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로컬 관광지가 좋은 이유는, 말 그대로 로컬들이 꼽은 관광지라서 특색있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물가가 안정돼있다. 찾아보니 포지타노나 아말피, 소렌토 같은 외국인에게 유명한 관광지는 숙소 1박이 최소 15만원, 20만원부터 시작하던데 여긴 6,7만원에도 올드타운 내 예쁜 숙소를 구할 수 있다는거(물론 운이 좀 필요하다).


해변에 자리를 깔고 바다 속에 들어가 누웠다. 바닷물이 상상 이상으로 짜서 물 마실때마다 현기증 날 정도긴 한데, 그만큼 몸도 잘 떠서 가만히 수면의 흐름에 온 몸을 맡길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누워있으면 바다보다 더 푸르고 투명한 하늘, 날파리떼처럼 불규칙하게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저멀리 새들, 절벽 위 파도로 함께 깎인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완벽한 날씨, 완벽한 풍경, 실없는 웃음. 별 것 아닌 걸로도 누구보다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절벽을 타고 다시 돌아올 정도로. 코에 물 들어갔어, 바위에서 미끄러졌어, 나 방금 오줌 쌌는데 너무 시원해(?) 뭐 이런 것들. 한참 웃다가 너무 행복해!!! 라고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 안팎을 왔다갔다, 몸을 적셨다 말렸다, 그렇게 오늘도 수영복 자국이 하얗게 남을 때까지 잘 놀고 절벽 위의 하얀 올드타운도 구석구석 누볐다. 매끈한 돌 바닥에 스케이트를 타겠다고 마구 뛰어 슬라이딩, 와하하 하는 나를 골목 카페에 앉아 커피마시던 사람들이 구경하고. 그리고 골목의 끝에는 언제나 기다렸다는 듯이 넓고 푸른 바다와 절벽 그리고 강렬한 햇빛이 있었다.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야! 라고 수십번 외친 날.



평생 마음에 남을 것 같은 마을을 뒤로한 채 집에 가는 길, 집보다 조금 더 간 시내에 들러 라면을 샀다. 영이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고, 한시간을 기다려도 집에 가는 버스는 오질 않았다. 알고보니 오늘은 버스 파업이 있는 날이었다. 다행히 집까지의 거리가 2.6km정도로 아주 멀지는 않아서-피곤해서 죽기 직전인 우리에겐 먼 거리였지만-해안 도로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9시가 넘으면 드디어 해가 완전히 지는데, 5시 전에는 유령도시 같더니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온건지 해안도로를 따라 쭉 늘어선 벤치가 모두 찼다. 친구들, 연인들, 가족들, 혼자,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 이게 바로 이탈리아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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