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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Aug 09. 2019

이탈리아의 마지막, 제노아

2019.07.03



정말 간만에 쓰는 당일 일기. 영이가 떠나고 나니 밤산책 메이트가 없어서 허전하다. 혼자 호스텔 근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놀거리를 하나도 찾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공용공간은 나같은 사람들로 이미 정적이다. 넷플릭스 보는 사람, 핸드폰 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아무도 말이 없다. 어쨌든 간만에 호스텔이다. 엊그제도 호스텔을 쓰긴 했지만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제 밤엔 로마에서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북부 제노아까지 오는 야간 버스를 탔는데, 새벽 5시에 그것도 중앙역이 아닌 간이역에 내려버렸다. 해도 뜨기 전인데다 사람이라곤 같이 버스에서 내린 남자 셋 뿐이라 조용히 그들 시야 내에 앉아 카페들이 문을 여는 6시까지 기다렸다. 6시에 카페에서 소이 카푸치노를 한잔 마시고 아침 7시에 호스텔 문을 두드려 들어왔는데, 너무 피곤하고 사람 대하기도 귀찮아서 9시 반까지 말거는 사람들에게 짧은 대답만 간간히 하며 글쓰기에 집중했다.(강제로. 낮잠 잘 침대 생길때까지. 덕분에 엄청나게 밀린 글들을 상당히 해결했고 졸리지만 혼자 즐거운 오전을 보냈더란다.)


그런 내가 너무 크리피한가 싶어서 (안그래도 크리피 아시안이라는 텍을 달고 다니는 판에) 약간 신경쓰였지만 이젠 정말 사람 대하는게 일이다. 사람들에 대한 궁금함도 없고-뭐 갭이어 하는 중이겠지, 여름휴가 왔겠지, 짧은 휴가일수도 있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새로운 사람이 지겹다고 해야하나. 어차피 불편할 사람들인걸.
결국 아침 일찍 침대 받기에 성공했다. 북쪽에서도 역시 친절한 이탈리안. 이탈리아 여행 내내 친절한 사람들 덕에 행복했다. 스페인어 공부 좀 하고 나면 완전 비슷한 이탈리아어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음에 오면 꼭 써먹어야지.



아, 여기서는 1시까지 낮잠 자는 데에 죄책감이 전혀 없다. 여행하면서 항상 스스로를 핀잔하는게 게으름인데 (게을러도 너무 게을러서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게 아쉽다.) 여긴 어차피 5-6시 전까지는 날씨덕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걸 드디어 깨달았다. 전엔 당연히 낮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여기선 여기 사람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단 걸 안거다.



두시쯤 슬슬 나와 해변에 가려고 올드타운을 통과하는데, 올드타운에 들어서자마자 홍등가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어서 눈을 의심했는데 의심할 여지 없이 홍등가였다. 아주 좁고 오래된 길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앉은 사람들을 보며, 그 사이를 지나치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게 우울했다.

그리고 그 길을 지나치자마자 우연히 작은 비건 식당을 발견해 들어갔는데, 이탈리아는 법적으로 ‘푸드스톨’식 식당은 일회용 식기만 사용할 수 있게 되어있고(그래서 들고다니는 내 식기가 정말 요긴한데 얼마전에 포크랑 숟가락을 잃어버려서 플라스틱 포크 하나를 재사용하며 들고다니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지 여긴 플라스틱 아웃을 크게 붙여 모든 식기를 생분해로 제공하고 있었다. 음식을 받아 내가 내 포크를 사용하겠다고 하니 식당 주인이 생분해 포크라고, 플라스틱이 아니라며 이걸 쓰라고 말했다. 식당 주인도 생분해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도 난 내 포크를 쓰겠다고, 쓰레기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시선이 몰렸다. 비건식당의 이 작은 아시안이 귀엽다는듯 다들 웃었다(피해의식인가).


밥은 정말 웬일로 맛있었다. 페스토와 부드러운 크림, 시트를 겹겹이 쌓고 견과류가 씹혀 향도 식감도 심심하지 않은 페스토 라자냐와 템페 아스파라거스 볶음, 그리고 보리와 병아리콩을 부드러운 소스로 볶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정말 부드러운 맛이었다.) 무언가? 다 먹고 거기서 파는 티라미수가 너무 먹고싶은데 플라스틱 컵에 담겨있길래 플라스틱 없이 내 접시에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우린 플라스틱 안쓴다고, 다 생분해라고 반박할 틈도 없이 다른 식기들까지 마구 꺼내서 보여줬다. 생분해가 진짜 생분해가 잘 되고 있는지, 그걸 만들고 배송하는데 드는 에너지와 식물과 물, 기타등등 생분해에는 고려해야할 것들이 다회용보다 훨씬 많은데 계속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생분해는 절대적이야. 생분해는 마구 써도 돼. 예민하게 굴지마. 생분해 처음보냐는 듯, 니가 뭘알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시아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내가 생분해가 뭔지 모른다고 생각한건 확실하다.) 아무튼 그래서 식당을 나와 걷는데 너무 속상했다. 너무 속상해서 화도 났다. 왜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 못해요. 내가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도 속상했다. 요즘은 왜 이렇게 말을 아끼게 되는지. 왜 이렇게 내 생각을 말하기가 싫은지. 발화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선 말을 아예 안하게 된다.




그렇게 우울한 기분으로 헤매고 헤매 결국 근교 바닷가에 도착했다. 큰 기대 안했는데 역시 이탈리아 바다는 참 예쁘다. 발이 닿지 않는 물 속에 햇빛의 무지개 꽃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물살이들. 한참을 가만히 바위에 앉아 있었더니 보이지 않던 바위 위 생명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손을 뻗지 않으면 이렇게나 자연인걸.

이젠 비키니 상의가 너무 거추장스럽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이다. 오늘도 그냥 벗어버렸다. 벗기까지 5분간 시선강간, 추파 혹은 심하면 안전 문제까지 모든 상황을 떠올렸다. 그래도 일단 벗어야겠어. 갈수록 비키니 상의 벗는게 쉬워진다. 몇년을 고민하던걸 이젠 5분 내로 해결 가능. 벗는 순간 숨통이 트인다. 잠수를 할 때도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숨을 더 오래 참을 수 있으니까. 가장 좋은건 바다의 감각이다. 보들보들 시원한 바다.



복숭아를 베어물었는데 이렇게 빨간 복숭아는 처음 본다. 속까지 다 빨간색. 손에 피 흘리듯 복숭아의 빨간 즙이 흘러내렸다. 작년 해변에서 보드타다 다쳤을 때, 햇빛에 반사되고 물빛에 대비되던 내 피 색을 아름답다고 느꼈던게 생각났다. 예술같았다. 못 먹는 부분을 남겨 손으로 짓이겼다. 온통 빨간 복숭아 즙이 뚝뚝 떨어지고 여기저기 튀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대로 햇빛에 말라버렸다.




서너시간쯤 혼자 수영하고 바위에 누워 놀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1층에서 눈 마주쳤던 남자가 뒤이어 숙소로 들어와 ‘어 방금 본 사람!’ 했다. 그래서 대화를 시작했는데 진짜 말이 존나 많다. 저세상임.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5문장으로 대답한다. 불가능할것 같지만 진짜 가능하다. 그 남자가 같은 방에 있는 중국인 남자에게도 말을 걸었는데 대답을 잘 안하더라.


샤워하고 오니,
걔: 그 사람 진짜 말 없어
나:기분이 아닌가보지
걔: 아냐. 정말 말이 없어. 대답을 안해. 그래서 그 남자 중국 어디서 왔고 건축 공부하고 어디어디 다녀왔고 뭐뭐 했대. 어쩌고 저쩌고
나: ... 고문했어?


아무튼 그래서 저세상 말많은 남자를 뒤로 하고 혼자 산책을 다녀온 것으로 다시 일기 초반으로 돌아간다. 어느새 거의 한시간이 흘렀네. 어제 밤에 버스에서 자느라 제대로 못잤으니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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