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 Feb 10. 2023

3월, 골목, 빨강

  낯선 골목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익숙한 골목을 걷는 것도. 봄, 여름, 가을 내내 낯설고 익숙한 골목 골목을 탐험하듯 걷다 보면 겨울이 온다. 겨울에는, 한 골목의 끝에서 끝으로 걷는 사이에도 손 끝이 얼어 버린다.

  언 손이 녹을 때까지 기다린다. 숨죽여 기다리면 3월이 온다. 3월의 골목에는 노란 개나리 꽃이 피어있다. 꽃술 위에 얕은 눈이 쌓이기도 한다. 봄인듯 아직 봄이 아니다. 빨간 장미가 피기 직전이 가장 골목을 걷기 좋은 때다.


  20대의 첫 5년을 아빠가 지은 하얗고 큰 전원주택에서 보냈다. 그 집은 아파트 숲 사이, 벌목된 듯 키 작은 전원주택 단지의 꼭대기에 있었다. 단지 내 모든 집이 새 집이었고, 그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모두 다른 건축가와 집주인의 감각을 온 몸으로 뽐내는 각자 다른 집들이었다. 서로 다른 집에는 서로 다른 나무와 꽃이 자랐다. 우리 집에는, 대문을 휘감는 빨간 장미 넝쿨이 있었다.


  계절마다 변하는 주택 단지의 풍경을 좋아했다. 집에 가려면 키 큰 아파트 단지를 통과해야 했는데, 아파트 건물은 언제도 변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회색, 차갑고 단단한 벽. 아파트 단지를 통과해 주택 단지로 들어서는 순간을 극적으로 느꼈다. 매 계절 다른 나무와 꽃이 생생했다. 옆집에서 봄꽃이 핀다면 앞집에선 여름 나무의 초록이 우거졌다. 분명 집의 모양은 변하지 않는데, 땅에 단단히 박힌 집마저 계절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듯 했다. 나는 자주 단지 내에서 길을 잃었다.


  추운 겨울엔 길을 잃지 않았다. 추운 날 집에 올 때는 단지의 유일한 큰 길,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3월에는 작은 놀이터가 있는 골목을 지나 집에 갔다. 그때부터 집에 가는 길이 조금씩 길어진다. 앞 골목의 하얀 집에 작년에 폈던 꽃이 이번에도 폈는지, 그 옆집 나무는 겨울을 잘 이겨내고 색을 되찾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는 잘 알았다.


  3월이 지나면 우리 집의 장미 넝쿨이 초록을 띄었다. 이파리가 솟고 봉오리를 맺었다. 그때부터 나는 익숙하고 낯선 골목을 걷다가 자주 길을 잃었다. 단지 내의 주택들이 초록을 둘러 치장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왠지 작년엔 보지 못한 것 같은 집이 많이 생겼다.


작가의 이전글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