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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eom Sep 04. 2021

예술가는 왜 가난해야 하는가(1)

순수예술의 신화성과 그 대안으로의 NFT




 우리 사회에는 ‘예술’이라는 기표가 갖고 있는 신화가 존재한다. 예술이 지나치리만치 위대하거나 숭고한 것으로 포장되듯 예술은 세속의 유혹을 끊임없이 극복해야 할 것 같으며 언제나 기성사회의 안티테제이자 시대의 대변자로 역할해야만 한다. 또는 자본과 대중성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외골수가 마치 자유로웁고 진정한 예술가로 인식되는 아주 위험한 신화이다. 이런 신화는 믿음으로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는데, 상기한 예술인으로서의 덕목이 지켜져야만 예술계의 주류 사회에서 ‘진정한 예술인’으로서 동료에 의한 인정, 비평적 인정, 화랑과 컬렉터로부터의 후원, 그리고 대중들의 갈채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와 보자. 예술가가 끊임없는 자기 착취를 감행할 만큼 예술에 덧입혀진 신화에 동조해야 하는가? 예술의 내적가치와 세속적인 모든 것들은 반드시 양분되어야 하는가? 또 예술의 신성성에 통감하지 못하는 비예술인들(대중)과 대중적 채택을 받지 못해 가난에 허덕이는 예술가들에게는 이러한 신화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2018 예술인 실태조사’에서 한국의 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통해 연간 평균 1,281만 원으로 한 달에 100만 원 남짓의 수익창출을 얻는다는 사실을 확인해보자. 이는 같은 해 최저임금제 기준 연간 수입액이 약 1,888만 원인 것과 비교하면 그 수준이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의 내적 가치도 물론 중요하다. 예술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감각적인 경험과 성찰을 일깨워주고 시대정신을 반영해준다. 때로는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일상적인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도피처가 되어주는 매우 소중한 존재가 예술이다. 진정성 있는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함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실제로 구현되는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데다가 예술이 자본과 상업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예술의 내적가치가 상승한다는 등식도 맞는 얘기라 할 수 없겠다. 예술의 성장도 수요와 공급의 경제 원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미술의 역사는 미술의 전성기가 항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칭키즈 칸이 중국 전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유럽 등 전 세계의 절반을 장악하였던 12세기는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이 활발해지고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미술 또한 황금기를 맞았던 시기였다. 르네상스 태동의 배후에는 이탈리아의 무역 발달로 인해 금융업을 발달시킨 메디치가의 후원이 있었고, 현대미술의 수도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기울던 것도 20세기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였다. 현대에 들어서 자본이 미술의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이는 비단 작금의 현상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사는 언제나 자본 논리에 영합하여 전개되어 왔다. 과거에는 종교적 논리, 국가주의적 논리 등에 가려져 있단 시장 경제의 민낯이 더 솔직한 모습으로 노골적이게 드러난 것뿐이다. 그럼에도 예술은 ‘안티 자본’을 지향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술의 신성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예술의 신화는 현시대의 주류 미술계의 미술관과 그와 관계된 작가들, 큐레이터, 평론가, 화랑, 언론 사이의 끊임없는 공모 속에서 그들의 견고한 권위를 위해 유지되는 듯하다. 이들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구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원체 예술은 ‘구별 짓기’를 위한 문화적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상기해보자.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고급과 저급, 순수예술과 상업예술과 같은 이분법적 구조의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서 예술은 고상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고상함은 곧 예술계 구조 내부에 존재하는 권력의 표상이고, 모순적이게도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권력은 자본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이는 미술계뿐만 아니라 전통예술, 서양음악, 영화 등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네덜란드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은 그의 저서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Amsterdam's stedelijk Museum)이 독일의 자동차 기업인 아우디의 자금 지원 제안을 ‘예술의 자율성 침해’라는 명목으로 거절한 사례를 들어 이렇게 얘기한다.

 “예술세계는 상업성을 혐오하기라도 하는 듯한 고상한 태도가 발견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이라는 신성한 사원 역시 시장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임을 안다. 사실 시장 거래는 예술이라는 사원을 지탱하고 있는 기반이다. 그럼에도 예술세계는 예술의 신성함과 이러한 상업성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상업성을 외면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한다. 우리는 상업성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상업성을 추구하는 예술세계의 이중적인 얼굴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요컨대 예술가는 가난함과 함께 예술에 죽고 예술에 사는 외골수로 캐릭터 설정되는 진부한 클리셰, 빈곤의 절박함 속에서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언더독 신화는 지나친 허상이다. 현시대의 예술가들은 자본과 보다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상업성을 추구해야 할지 모른다. 자본만을 맹종하고 배금주의를 쫓으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와 기법으로 대중들을 설득하고 시장경제를 영리하게 활용하기 위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근래에는 그러한 고민을 투영해볼 환경이 늘어나고 있다. 미술품 가격과 상징적 진입장벽이 높던 갤러리 중심의 중앙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미술시장이 다각화되는 중이다. 그러한 변화 속 아트페어(Art Fair)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한 토큰)가 미술품 거래에 대한 대중적 수요와 예술의 다양한 상업적 시도를 충족시켜줄 시스템으로 기대해볼 수 있겠다.




다음 글, 예술가는 왜 가난해야 하는가(2)에 계속





Reference:

1. <Why Are Artist Poor?: The Exceptional Economy of the Arts>, Abbing Hans(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예술 경제의 패러독스).

2. <한국 미술가들의 ‘딜레마’와 ‘보편적 미학’으로의 길>, 박정애.

3. <작가의 창작 윤리와 한국 미술계의 구조>, 박영택.

4. <What is Crypto Art?: Crypto Art에 대한 개념적 고찰>

5. ‘2018 예술인 실태조사 보고서’, 문화체육관광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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