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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찬묵 Apr 06. 2017

영화로 보는 고독과 공존:The way way back

공존과 고독의 연결성

1. 배경

트렌트 : 너는 십점 만점 중에 너를 몇 점이라고 생각해?

던컨 : 6점이요?

트렌트 : 뭐? 내가 보기엔 넌 3점이야,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어.
우리 별장에서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엄마의 새 남자친구 트렌트는 엄마와 딸이 잠든 사이 던컨에게 언어폭력을 가한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던컨을 3점짜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던컨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그는 '우리 모두'를 칭하며 던컨에게 공존을 강요한다.


아무도 입지 않는 구명조끼를 입힌 트렌트와 엄마


던컨이 트렌트의 언어폭력에 대항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의 내성적인 기질도 있겠으나 엄마의 행복을 바라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트랜트가 시켰어도 엄마가 행복할 수 있다면 아무도 입지 않는 구명조끼를 혼자 입을 수도 있고, 함께하고 싶지 않은 가족 식사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중심엔 엄마의 행복을 위한 뿌리가 내려앉아 있다. '내가 참으면 엄마는 행복할 수 있어'


그러다 우연히 워터파크에서 일하는 오웬을 만나고, 그는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오웬 : 나이도 어린놈이 상상력은 어디다 팔아먹었냐?
패턴은 안돼, 너만의 길을 찾아


오웬은 때로는 툭툭 던지며, 때로는 섬세하게 던컨을 챙긴다. 이미 알려진 이기는 방법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보라 말한다. 항상 엄마의 행복을 위해 마지못해 살았던 던컨은 처음으로 자신만의 존재를 위한 조언을 듣고, 그를 따라 워터파크 파트타이머로 일을 시작한다. 파트타이머의 일은 그에게 자아효능감을 갖게 해주었으며 점점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2. 고독

엄마의 행복을 위한 던컨은 고독하다. 그리고 이혼 뒤 던컨을 혼자 키워야 하는 출장 요리사인 엄마도 고독하다. 또 한가족의 로망을 꿈꾸는 트렌트도, 그리고 규칙과 패턴을 강요하는 아버지를 두었던 어린 오웬도 고독했다. 이렇듯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독을 갖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공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공존에는 규칙이 있다. 서로의 존재(=고독)를 인정하고 함께하는 것.


3. 공존

가족의 권력(경제력)을 쥔 트렌트는 던컨에게 강요된 공존을 권한다.

권력 :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 네이버 발췌

"우리"라는 말을 한번 더 인식시키며, 한가족이 되어야 함을 강요하는 트렌트의 모습은 잘못된 공존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내가 없는 공존은 공존이 아니다.


워터파크 직원들은 던컨에게 있는 그대로의 공존을 보여준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춤은 자신의 존재 표출이며, 주변 사람들은 이를 함께 지켜봐 준다. 혼자 춤을 췄을 때에는 이상할 수 있지만, 이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서로를 인정하고 웃으며 함께 응원한다.


-

예전에 이상한 작곡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작은 소모임에서 만난 그 현업 작곡가는 갓 졸업한 새내기인 나에게 대단해 보였다. 누구나 알만한 기획사와 음반사에서 일했던 이력을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이끌어갔던 그는 나에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어떻게든 그와 더 이야기해보고 싶었고, 어떤 단계를 밟아 나아갔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모임에 나갈 때마다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었고, 결국 한번 작업실에 놀러 오라는 이야기에 가슴 들떴던 때가 생각난다. 그의 작업실은 자신의 오피스텔이었는데, 이런 게 작곡가의 방인가 하며 모든 것을 신기하게 봤었다. 나는 곧 내 친구들도 그에게 소개하여주고 싶었고, 한 번은 실제로 친구 한 명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일이 있어 작업실에서 먼저 떠나고 난 뒤, 그 사람은 나에게 친구 욕을 했다. 흉을 보며, 자기 마음대로 그 친구의 한계를 논했다. 나는 화가 났지만,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감싸주기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나의 다른 친구들의 영상을 찾아보며 또 욕을 해댔다. 나는 정신이 너덜너덜해졌고, 그는 이어 우리가 만났던 소모임 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간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따졌더니, 자신이 이 업계에 너를 소문내면 너는 발도 못 붙일 거라며, 내가 못할 것 같냐며 겁박을 했었다. 결국 아무 소리 못하고 방을 나왔고 며칠간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주변에 계셨던 선생님들께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너를 '꼬마 작곡가'로 만들려고 그런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꼬마 작곡가'란 작곡가 밑에 그를 따르는 작곡가를 이야기하는데, 이런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수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수발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것도 있어 더 이상 언급하진 않겠다. 어쨌든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끊어내고 자신만을 쫓게 만들려고 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제야 그 인간이 왜 그렇게 했나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5,6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그런 인간을 만나본 것이 다행이라고 느끼는데, 그 이유는 이번을 계기로 음악계에는 이런 XX한 사람도 있구나를 깨달았고, 두 번째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이다. 그때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나는 한참이나 멀어진 강요된 공존을 하고 있었겠다 싶다. 그것은 공존을 표방한 또 다른 고독을 낳는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건강한 공존이 필요하다. 아니, 나로서 건강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공존이 필요하다. 건강한 공존은 개인의 바로섬과 타인의 애정 어린 인정이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다시 한번 지금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언제나 조심하고,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느 공존 속에 있을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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