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K한테서 메일이 도착했다. 처음으로 직접적인 구매를 해봤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선임인 MRO 담당자 최대리가 집안 일로 갑자기 휴가를 쓰는 바람에 기회를 얻었단다. 겨우 구매요청 1건을 처리하는데도 파트장 결재를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MRO 구매 파트장? 이 양반이 여간 깐깐한 사람이 아니라서 회사 내에서도 악명(?)이 높은 사람이란다. 구매요청서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으면 직급을 막론하고 무조건 반려다. 최근에는 직원들 대화방에서 공공의 적으로 몰려 말들이 많았을 정도라고 한다. K가 제대로 걸린 것이다. 다음은 K가 메일을 통해 전해 준 이야기이다.
팀장님! MRO 구매담당자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이틀 정도 직접 구매를 해 봤습니다. 일단 드는 생각은 '구매를 제대로 하는 것이 정말 어렵구나.'입니다. 특히 파트장이라는 분은 되게 까칠한 분이거든요. 구매팀 내에서도 제일 무서운 분으로 회사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물론 업무적으로 말입니다. 구매도 처음이지 그리고 파트장도 쉽지 않은 스타일이지. 첩첩산중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제가 어려운 물건을 구매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상용품인 CCTV를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K 씨, 이 구매요청의 근거는 뭔가요?”
“네. 파트장님. 1 공실 외곽의 CCTV를 교체하는 건데요.”
“그러면 기존에 설치된 CCTV가 고장이 난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기존 제품이 오래된 구형이라 화질이 많이 떨어지고 야간 촬영도 가능하지 않아서 좀 더 기능이 나은 걸로 바꾸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데 왜 3개를 요청했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내 말은 공실 별로 설치된 CCTV는 원래 2개가 1조로 설치되어 가동되잖아요. 1 공실도 마찬가지일 텐데, 왜 3개야 이 말이죠. 남는 1개는 뭐죠?”
“그거까지는 제가 미처..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K 씨는 물건 구입할 때, 현장 확인도 안 하는 모양이지요.”
“제가 다른 업무로 너무 바빠서 현장까지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구매 요청자에게 구두 확인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3개를 구입하는지.”
“아니요. 저는 그냥 서류만 확인하고서..”
“K 씨는 책상에 앉아서 서류로만 일하나요.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세요. 신입사원이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합니까? 회사 돈 쓴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내 돈 주고 내 물건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못합니다. 현장 확인하고 와서 다시 봅시다.”
그러고도 현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파트장으로부터 한참 들었습니다. 현장에 답이 있다. 현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구매요청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물건을 사달라는 입장에서는 엄살과 거품이 많기 마련이다. 거기에 넘어가지 마라. 하지만 현장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현장을 직접 가봐야 실상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장을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등등. 파트장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저는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파트장 말대로 공실 별로 2개의 CCTV가 설치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왜 3개를 구매요청을 했을까? 점심시간 전에 구매 요청한 담당자를 만나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구매 이유를 파악했다면 됐어요?라고 끝날 줄 알았던 파트장의 훈시가 오후에도 이어졌습니다. 구매 요청자는 나름대로 그들만의 입장이 있고 구매 또한 구매 조직만의 시각이 있다. 물론 모두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소싱 담당자가 일을 편하게 하자고 하면 아주 간단하다. 구매 요청자가 구입해 달라는 대로 그냥 그대로 구매해주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처리하면 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구매는 그냥 형식적으로 거쳐 가는 부서와 절차로 전락하고 만다. 소싱 담당자의 능력은 떨어지고 조직의 역량은 저하된다. 구매 조직의 존재 의의도 찾을 수 없다. 구매 스스로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다. 현장에서 MRO 구매하기가 힘들다고 내 욕을 많이 하는 것, 나도 알고 있다. 나도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다. 누가 자기 욕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좋은 소리 나오게 하는 방법도 안다.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면 된다. 아무 소리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된다. 마음 편하게 말이다. 하지만 회사 일이다. 기준과 원칙은 지켜야 한다. 회사 돈을 쓰는데 함부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따져보고 확인하고 점검해야 한다. 그게 회사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회사가 나에게 부여한 권한이기 때문이다.,라고 자기 나름의 구매 철학을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구매를 진짜 제대로 하려면 끝이 없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다음날 구매 요청자와 최종 협의를 했습니다. CCTV 여유 재고 반영 여부에 관해서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구매 수량은 2개로 가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상용품이다 보니 언제든지 구매 가능한 품목이기도 하고, 거래업체에서도 항상 적정재고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사용 중인 현장의 CCTV에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우선 조치를 해주는 것으로 담당자와 합의를 봤습니다. 단순한 품목인데도 구매 검토에 제법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 구매품의를 작성해서 최종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발주서가 발행되거든요. 갈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잘 되겠지요. 팀장님! 많이 응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