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화:고요한 척하는 폭풍 속에서

나는 원래 싸우며 버티는 아이였다

by 지화


나는 원래 싸우며 버티는 아이였다.
그게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입학한 읍내 여자중학교는 읍내 초등학교뿐 아니라 주변 면 단위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여자아이들까지 모두 모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었다.

나는 더 강한 척했다.
씩 웃고, 먼저 다가가고, 없는 여유도 있는 척했다.
돈이 많은 척, 외롭지 않은 척, 다 괜찮은 척.
그렇게 분위기를 띄우고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 시절엔 스마트폰도 없었다.
핸드폰이 없는 아이들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교실에는 무리가 또렷했다.
쉬는 시간마다 어디에 앉는지, 급식 줄에서 누가 내 뒤에 서는지, 그 사소한 것들이 관계를 결정지었다.
나는 그 질서에 맞춰 적응하려 애썼다.

겉으론 어울리는 것 같았지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나는 늘 겉돌았고, 혼자였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와는 말다툼이 잦았다. 무시와 멸시, 가시 돋친 말들, 때론 손찌검도 오갔다.
막내는 조용히 눈치만 봤다. 둘째를 피하느라 나에게도 거리를 뒀다.
가족 안에서도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엄마는 시골로 이사 온 뒤 달라졌다.
서울에 있을 때도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는 반찬을 만들었고, 장을 보았고, 외출도 자주 했다.

하지만 시골에 온 뒤로 엄마는 자주 짜증을 냈고, 고성을 질렀다.
"죽고 싶다."는 말도 자주 했다. 한밤중에도, 아침에도, 이유 없이 울부짖었다.
우리 가족은 그 말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한숨만 쉬었고, 우리는 모두 무기력하게 그 말을 흘려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엄마를 마음속에서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엄마와 비교했고, 기대하지 않게 됐다.

내 엄마는 내 교복을 다려준 적도, 아침밥을 차려준 적도 없었다.
그게 엄마의 탓이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나는 더 이상 '엄마'라는 존재를 기대하지 않게 됐다.

그 시절 나는 공책에 상상 속 이야기를 썼다.
웃는 가족, 손잡고 시장에 가는 엄마,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우리.
현실에선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서만큼은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요리사가 되고 싶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며 상상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가족이 다 같이 먹으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그게 요리사라는 꿈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그럴 수 없었다.
조리 특성화고에 가고 싶었지만 입학금, 재료비, 통학비까지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부모님과 말싸움도 했지만, 결국 뜻을 꺾었다.
나는 읍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꿈은 또 한 번 미뤄졌다.

그 무렵부터 내 마음엔 작고 날카로운 인식이 자라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은 친구들 부모님과 다르다는 것.
엄마는 다리를 절었고, 아빠는 글을 읽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가난했다.

시골이라 아는 사람은 다 알았지만, 나는 부모님을 길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했다.
가난과 장애.
그 두 단어는 내 사춘기를 깊게 눌렀다.

졸업식 날 아침,
아빠는 읍내 꽃집에서 꽃다발을 샀고, 필름 카메라에 새 필름을 갈아 넣었다.
친구들은 무리를 지어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 주위를 맴돌며 누군가 나를 불러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아빠는 나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눈치채지 못한 척, 괜찮은 척.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길 위, 우산도 없이 꽃다발을 안고 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문을 닫았다.
엄마는 말이 없었고, 막내는 방 앞을 맴돌다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다 둘째가 툭 말했다.

"얼굴이 괴물인데 친구가 어딨어?
엄마, 아빠도 알잖아. 쟨 왕따야."

엄마는 고개를 떨궜고, 아빠는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날, 부모님은 처음으로 내 외로움을 마주했다.

그 시절의 나는, 고요한 척하는 폭풍이었다.
겉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은 끝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나는 혼자 다음 시간들을 버텨야 했다.

keyword
이전 03화2화:상상 속에서만 웃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