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으려 애쓴 게 아니라, 무너진 채로도 버티고 있었던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땐 친구가 많았다.
밥도 같이 먹고, 생일 초대장을 주고받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았다.
누구도 겉모습으로 친구를 가르지 않았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울릴 수 있었다.
장난으로 티격태격해도, 다음 날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웃으며 함께했다.
그 시절, ‘친구’라는 말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숨 쉬듯 당연한 것이었다.
이사를 앞두고 친구들은 작은 종이에 집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꼭 전화해, 잊지 마.”
그 메모들을 이삿짐 어딘가에 넣었지만, 이사 후 한 번도 꺼내보지 못했다.
서울 친구들과의 연결은 그렇게 조용히 끊어졌다.
돌이켜보면, 그 단절은 생각보다 깊고 길었다.
나는 시골에서도 서울처럼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학 첫날, 그 믿음은 금세 무너졌다.
“안녕, 나 서울에서 전학 왔어!”
교실 문을 열자마자 스스로 먼저 말했다.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고, 목소리도 컸다.
그러나 돌아온 건 놀람과 경계, 곧 이어진 외면이었다.
아이들이 기대한 ‘서울 여자애’는 얌전하고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다.
조용하지 않았고, 말투도 행동도 튀었다.
곧 그것은 편견이 되었다.
게다가 내 얼굴.
튀어나온 앞니와 덧니, 부정교합.
웃으면 온 이가 다 보였다.
“생쥐다.”, “괴물이다.”, “쯔쯔가무시 같다.” 그런 말들이 일상이 됐다.
전학 온 지 일주일도 안 돼 왕따가 됐다.
나는 참지 않았다.
욕으로 맞받아쳤고, 기분 나쁘다고 말했고, 화가 나면 소리도 질렀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더 멀어졌다.
나는 ‘무서운 애’가 됐다.
집도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예민해졌다.
서울에서는 혼자 할 수 있던 일들도 불편해졌고, 짜증과 고성이 잦아졌다.
아빠는 생계를 책임지느라 눈빛을 나눌 틈도 없었다.
동생들도 각자 적응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둘째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막내는 둘째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지냈다.
나까지 감정을 내놓기엔,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 있었다.
그때 나는 너무 외로워, 상상 속에 친구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들키지 않게.
그 친구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놀림받지도, 혼자 있지도 않았다.
상상은 현실을 버티게 해 주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나를 조용히 붙잡아 준 손길이 있었다.
가장 인기 많은 여자아이가 먼저 말했다.
“우리 친구 하자.”
그 한마디가 하루를 버티게 했다.
쉬는 시간에 함께 앉고, 급식 줄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던 순간들은 짧지만 귀한 위로였다.
몇몇 남자아이들도 누가 뭐라 하든 나와 뛰어놀았다.
비디오를 본 적도, 소독차를 따라간 적도 없었지만, 함께 뛰며 숨이 차도록 웃었다.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고맙다.
완벽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아이들은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
아마 그 작은 온기가, 그 시절의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했을 것이다.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쓴 게 아니라,
무너진 채로도 계속 일어서고 있었다.
조용하지도, 순하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은,
중학교라는 또 다른 세계에서
다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