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보다 아래에서, 세상을 올려다보며 자랐다.
서울,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에서의 기억은 행복하고 즐거운 것들뿐이었다.
집은 늘 습했고 벌레도 나오는 반지하였지만, 별것 아닌 일에도 까르르 웃는 가족이었다.
근처에는 외갓집과 삼촌이 살고 있었고,
나는 항상 남동생들이랑 같이 놀았다.
주말에는 비디오 가게에 가서 만화 비디오를 대여해 와서 주인공들을 흉내 내고 웃고, 울고 그랬다. 심심하면 소독차를 따라 달리고,
놀이터에서 해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다 함께 술래잡기랑 대장 놀이를 했다. 저녁밥 먹을 시간에 맞춰서 엄마가 우리를 찾으러 왔다. 아빠는 퇴근 후에도 쉼 없이 움직였다.
아빠는 시골 출신이다.
집안의 장남으로 어린 동생들을 책임지며 자랐고,
마땅한 준비 없이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도 봉제공장에서 버텼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 하루를 채웠다.
퇴근하면 아이 셋을 씻기고 먹이며 하루를 마무리했고,
집안일을 끝내면 겨우 자리에 앉았다.
담배는 피우지 않았지만 술은 마셨다.
술에 취한 날이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표정이 굳었다.
그럴 땐 나는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몸은 그 긴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엄마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반신에 장애가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고,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던 청춘이었다고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른 즈음 선을 보고 결혼했고,
1년 간격으로 나와 둘째, 그리고 막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우리는 아빠 고향인 시골로 전학을 갔다.
단순히 주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일상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시골로 내려온 뒤, 풍경과 공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아빠는 쉬지 않고 일을 했고 엄마는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도시에서는 혼자 할 수 있던 일들이 여기서는 모두 불편해졌다.
의사는 엄마에게 걷기를 권했지만, 어느 날부터 걷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그 무렵, 엄마는 아빠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형제 사이도 변했다.
서울에서는 잘 놀던 사이였지만, 시골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버텼다.
특히 둘째와의 거리는 급격히 멀어졌다.
나는 전학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둘째는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는 내 약점을 알고 있었고, 형제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달리기와 공을 좋아해서 축구선수를 꿈꾸던 나는 학원 친구들과 공을 차는 둘째를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지만, 돌아온 건
“여자는 축구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 손을 밟았다.
골절된 손가락은 나의 첫 번째 꿈이었던
축구 선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그는 나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고,
집안에서도 그 일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막내와는 다투지 않았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둘째를 무서워했고, 나에게도 선을 그었다.
그는 어른들의 빈틈 속에서 조용히 살아남으려 애쓰는 아이였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엄마는 침묵했고, 아빠는 책임감으로 버텼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고, 동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됐다.
서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시골에도 친척들이 가까이 있어 병원이나 행정처리를 도와줬지만,
마음을 기대기엔 모두가 제 삶을 붙잡느라 벅찼다.
아빠는 흔들리면서도 우리를 붙잡으려 했다.
그 모습이 그땐 그냥 당연한 줄 알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버티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마음은 멀어졌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때로 나를 가두는 담장처럼 느껴졌다.
숨 막히고, 외로웠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서로가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하고 바랐다.
시간이 흘러 학창 시절에 나는
친척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대에 결혼한 것만도 걱정인데,
장애가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너희는 오죽하겠느냐는 말.
복지나 지원이 잘 갖춰진 시절도 아니었고,
형편도 넉넉지 않았다.
그래서 첫째인 나는 서울 외가에서, 둘째는 시골 친가에서,
막내는 태어난 직후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고 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런 와중에 입양 이야기도 나왔다.
어느 날은 결혼도 하지 않은 삼촌이
내가 아기였을 때 입양하려 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그 시절 우리 가족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삶이 시작되었을 때도 부모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가족을 버티게도 했지만 서서히 곪게 만든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학교에서,
그보다 더 낯선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