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면요...
수능이 끝났습니다. 시간이 하찮을 정도로 많아졌고, 자신감은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죠. 첫 아르바이트 자리도 바로 구했습니다. 계산기 좀 타닥거려보니 두 달치를 모으면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어느 2월, 그렇게 친한 친구와 도시 구석에 있는 운전전문학원에 등록하고 부산을 가느니 강화도를 가느니 하며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딱, 여기까지만 순조로웠습죠.
당시 집에 한 대뿐인 유일한 자동차는 95년인가에 출고되었다던 중고 씨에로였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1994년에 데뷔해 2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대우에서 가장 빨리 단종된 비운의 차라고 하네요. 너무 어둡지도 그렇다고 하얗지도 않은 어중간한 녹빛이 감도는 담록색 차를 꽤나 좋아했었는데... 비운의 차라고 하니 뒤늦게 더 애틋한 기분이 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12년 동안 단출한 4인 가족을 전국 이곳저곳에 데려다주었던 멋진 녀석이었거든요. 아, 이 이야기를 왜 했냐면, 지금껏 운전을 못하는 몸으로 살아온 이유에는 씨에로 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씨에로는 수동 모델이었습니다. 운전석 오른쪽에 묵직한 기어 스틱이 있었고 그 위에는 R과 1에서 6까지의 숫자가 적힌 작은 지도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기어 머리를 붙잩고 지도대로 움직이면 후진과 해당 숫자만큼의 기어가 들어가 속도를 조절해주었습니다. 또 발판도 세 개나 있었습니다. 브레이크와 엑셀과 망할 클러치. 그때까지만 해도 금전 감각에 무지했던 저는 집안 사정이 풍족하지 못하니 앞으로도 10년 넘게 씨에로를 몰고 다닐 줄 알았습니다. 학원에 가서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러더군요,
"학생, 2종 수동은 어려워.
그래도 수동을 따고 싶다면 시야가 확보되는 1종이 나중에 더 쓸모도 있고 좋을 거야."
그분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또 어디까지 상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등록할 때는 바른 길을 안내해 준 은인이었고, 연달아 시험에 떨어졌을 때는 비정한 장사치였으며,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냥 얼굴조차 기억 안나는 관계자가 되었으니까요. 어찌 되었든 1종과 2종이 무슨 차이인지도 모른 채 덜컥 접수부터 한 친구와 저... 필기시험을 보는 날이 되어서야 1종이 트럭이고 필기시험도 합격 커트라인도 더 높다는 걸 알았습니다. 따단.
필기는 자신 있었습니다. 수능 막 보고 난 학생이 겨우 그 정도 시험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덕분인지 1개만 틀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70점 이상만 맞으면 되었던 건데... 기합이 좀 과하게 들어가긴 했습니다. 다음은 기능 시험. 여기서 잠깐, 기능 시험이라는 말 어렵지 않나요? 처음에는 순발력 같은 신체 기능을 테스트하거나 정비 능력을 검사받는 건 줄 알았습니다. 여하튼, 학원 안에 마련된 어린이 교통안전공원 같은 곳에서 기본 운전 조작이 가능한지 보는 시험이었습니다. 게임으로 치면 기본 조작법을 알려주는 튜토리얼 모드라고 보면 되겠죠. 이 또한 문제없었습니다. 무척 간소화되었던 때라 안전벨트를 매고 언덕을 오르다 한번 멈춘 뒤 내리막길 다 내려가서 돌발 나왔을 때 급정지. 그리고 우회전인가 좌회전해서 정차하면 끝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할 정도로 쉽죠.
그래서 그때 면허를 딴 거 아니냐고요? 설마요. 저는 도로주행에 3번 떨어지고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었습니다. 회복하기까지 강산이 바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죠. 수동 스틱을 만진다는 건, 처음 듣는 개념을 이해하고 속도를 감지하며 민첩하게 기어를 바꿈과 동시에 클러치를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밟아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리듬 게임 좀 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는 손만 움직였을 뿐 발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제가 운전하는 트럭은 툭하면 시동이 꺼졌고, 그 이후로는 당황해서 실수하다가 점수 다 까먹고 터덜거리며 집에 가길 두 번. 드럼이라도 배웠다면 좀 나았을까 자조하며 세 번째 시험을 치르던 날 일이 터졌습니다.
마지막 코스로 비보호 우회전만 남겨둔 그 사거리에서 그날 처음으로 시동이 꺼졌습니다. 하도 겪은 일이라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키를 다시 돌리려던 그때, 제 바로 뒤에 있던 버스가 2초 정도 경적을 울렸습니다. 소리에 먼저 놀라고, 그 대상이 제가 탄 트럭이라는 걸 깨닫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습니다. 다시 시동을 걸지 못하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불합격이라고 말했던 감독관 얼굴만 선합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니 지금도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뜁니다. 경적의 의미는 "시동 꺼졌네~ 다시 걸렴." 하는 안내일 수도, "바빠 죽겠는데 길막하지 말고 얼른 꺼져." 하는 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제게는 후자의 의미로 다가왔고 멘탈이 탈탈 털려서 운전면허를 딸 생각을 아예 접었다는 것이죠.
같이 학원 등록했던 친구도 여러 번 도로주행 시험의 고배를 마셨지만, 결과적으로는 운전면허를 따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직한 친구거든요. 이제 이 친구는 올해 면허를 갱신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합니다. 이번에는 2종 오토입니다. 우리집 차가 오토 기어를 갖춘 카렌스로 바뀌었거든요! 수동에 욕심부리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