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운전면허를 따려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마지막 관문, 저는 도로주행이라고 자부합니다. 기능 시험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운전면허 학원 장내 도로는 아기자기하고 귀엽습니다. 코너에는 커다란 타이어를 안전장치로 붙여두었고 한눈에 보이는 전체 도로 상황은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걷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지요. 저 뽈뽈거리는 속도 안에서는 나도 빠르게 다닐 필요가 없고, 복잡한 신호 앞에서 멘붕에 빠질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뉴비 양성 구역이니까요. 그러니 실전 도로에서 만렙 운전자들과 나란히 달려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이 평화로운 곳을 제 발로 뛰쳐나가 죽음으로 한 발짝 가까워지는 것 같았달까요.
갑자기 차가 안 움직이면 어쩌지?
신호를 잘못 보고 출발하면 어쩌지?
사고라도 내면 어쩌지?
차선 변경을 못해서 운전면허학원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
도로주행 전날 온갖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분명 저것보다 더 다양한 상황을 상상하며 겁에 질렸었는데 지금은 모두 생각나지 않네요. 사실 별 것 아니었는데 과하게 걱정했던지라 돌이켜보면 좀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3시간밖에 못 잤거든요, 첫 도로주행 가기 전 날 말이죠.
학원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조용했습니다. 아마도 명절 연휴 기간이라서 학생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도로주행 시험을 보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 시간은 6시간. 대개 2시간씩 3일 간 교육을 받습니다. 이 시기에는 길을 외우고 운전하는 감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3일 연속으로 교육받는 편이 좋다고 합니다. 저는 마침 설 연휴 기간에 3일 연달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3일 차에는 교육이 끝나고 바로 시험을 보는, 아주 알찬 일정이 예쁘게 짜인 것입니다.
번호표를 뽑고 출석체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지도를 살펴봤습니다. A코스, A코스를 그대로 돌아오는 B코스, 편도로 저 멀리까지 가면 끝인 C코스, 가장 난해하다는 D코스까지. 어떤 코스가 시험문제로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길을 다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학원에서도 코스랑 주행 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려두었더라고요. 그러나 파워 P인 저는 걱정은 차고 넘치게 하면서도 길을 다 봐두지는 못했습니다. 어딜 가든 길은 잘 찾아서 별명이 '인간네비'인지라 길 외우기에 자신이 있었다는 점도 한몫했습니다.
다만 제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간과라기보다는 겪지 못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바로 걷는 길과 초보운전자가 익혀야 할 길 사이에 몇 가지 중요한 개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를 걷는 사람은 그냥 걸으면 됩니다. 마주 오는 사람이나 장애물이 나오면 적절히 피하고 자기만의 속도로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로에는 '차선'이 있습니다. 같은 길을 달리던 차들도 갈림길에 서면, 차선이 지정한 방향으로만 길을 가야 하지요. 좌회전을 하고 싶어도 내 차선이 직진 전용이라면 이번 턴에는 그른 겁니다. 가뜩이나 차선 변경이 어려운 초보자에게 내가 가야 할 방향의 차선을 파악하고 그 차선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는 너무 가혹하게 다가옵니다.
신호도 다릅니다. 초록 사람과 빨간 사람만 보면 끝인 신호등이 노란불, 갖은 모양의 초록색 화살표, 황색 점멸등, 적색 점멸등 등 종류가 늘어납니다. 물론 학원에서 신호 읽는 법을 익히고 나오긴 합니다만, 실전에서 순발력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요. 속된 말로 얼타고 있다가는 큰일 납니다. 좌회전해야 하는데 직진 초록불 보고 액셀을 밟았다가는 반대편에서 신호 받고 오는 차와 사고가 나게 되니까요.
속도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일반 시내에서는 50을 준수하고,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30을 준수해야 하며, 비보호 우회전 시에는 서행을 해야 합니다. 전방과 사이드미러를 보기에도 바쁜 머리는 여기서 울기 시작합니다. 속도 확인을 위해 계기판을 봐야 하는데, 그러면 도로를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요. 사람이 시야는 그보다 넓지 않냐고요? 그렇긴 합니다만 막 운전대를 잡은 제게는 핸드폰 화면 사이즈 정도의 시야만이 허용되었던 듯합니다.
어찌어찌 마친 첫 번째 도로주행은 A코스였습니다. 강사님을 만나 가능한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드리고,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차고, 시동을 걸고 출발! 아, 사이드브레이크를 안 풀었네요. 다시 출발! 아니, 학원에서 도로를 나가는 길이 생각보다 좁고 커브에 내리막 길입니다. 운전면허 학원이면 진입로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신 브레이크를 밟으며 기어가듯 내려가니 아.. 드디어 공도입니다. 우회전하면 이제 실전 시작입니다.
사이드브레이크도 안 풀고 냅다 액셀을 밟고, 차 두대는 충분히 지나갈 길을 빌빌대고 내려가는 절 바라보던 강사님이 무심히 한마디를 건넵니다.
"아직 학생이에요?"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아~ 휴학 중이에요?"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 그게 저..."
강사님이 계속 말 거시면 사고 낼 것 같아요, 가 목구멍 6부 능선까지 올라옵니다.
"회사 다녀요."
"아이고 귀한 연휴에 욕보네. 면허 왜 이제 따요?"
"1종 따려다가 도로주행에서 연거푸 떨어졌어요. 저.. 이렇게 가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강사님인지 택시 탄 손님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운전 팁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길을 짚어주는 것도 아니고, 정신 사납게 사담이라뇨.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잘하고 있는지 물어봅니다. 강사님은 잘 가고 있다고 하고는 다시 뭔가를 물어보고 말을 걸었는데,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계속 말 거는 강사님이 미워서 울고 싶었고, 그렇지만 울면 앞이 안 보이니까 꾹 참았을 뿐이지요.
A코스의 끝은 휑한 버스정류장 근처입니다. 여기서 버스 타는 사람이 있을지 의심될 정도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학원까지 돌아가는 게 B코스였습니다. 여차저차 A코스를 완주하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리자 기사님이 박수를 칩니다. 정말로 박수를요.
"침착하게 잘하네"
거짓말처럼 그 말 한마디에 미웠던 마음이 사르르 녹습니다.진심으로 한 말인지 그냥 인사치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감이 붙고 여유가 생기더군요. 제게는 이 모든 것이 처음이고 어렵지만 강사님은 이미 수백 번도 다녔을 길이 었을 테니 지루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3일 동안 이어지는 교육 기간은 평화로웠습니다. 유턴하는 꿀팁도 듣고, 코스에 있는 동네에 대한 강사님의 알쓸신잡 수다도 재밌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로 주행 코스 중 일부가 제가 초등학교 시절 잠깐 살던 동네 구역이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아 마지막 날은 강사님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편안한 마음으로 돌았던 코스였고 길도 다 익힌 이후였던지라 더는 걱정이 없었죠. 마지막 강사님은 강사 경력이 막 1년을 넘긴 열정 넘치는 분이셨는데, 딱 좋은 타이밍에 만났다 싶었습니다. 이틀간 강사님은 제게 자신감은 주셨지만, 시험에 붙기 위한 주의 사항은 좀 러프하게만 알려주셨거든요. 점수로 결과가 나는 시험에서 감점당하지 않는 요소를 미리 체크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날 강사님은 정석 그대로 어떻게 시험을 쳐야 감점을 받지 않는지 꼼꼼히 짚어준 고마운 분이었답니다.
시험으로 뽑은 코스는 A. 뒷좌석에 B코스를 돌 다른 수험생을 태우고는 사고 없이, 신호 위반 없이, 바른 경로로 무사히 시험을 마쳤고, 90점으로 여유롭게 합격했습니다. B코스로 시험을 친 동기(?)도 합격한 겹경사였지요. 비록 연휴를 통으로 날리고 어깨와 팔뚝에 심한 근육통이 생겼지만 모든 시험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제 면허증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