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깨닫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실 하나는 이제 더 이상 방학이 없다는 것이다. 주말 외에는 쉴 수 있는 날이 없다니. 은행도 병원도 관공서도 주말에 쉬는데 직장인들은 언제 개인 볼일을 보라는 것인지. 금요일 밤의 자유를 아주 잠깐 누리고 토요일 늦잠에서 깨는 순간 이미 주말은 저만치 멀어지고 있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월요병 증세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하며 우리의 주말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나고 만다. 한 주간 우리 안에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 우울과 분노가 해소되기에 주말은 너무 짧기만 하다.
초·중·고 16년 동안 32번이나 우리를 찾아온 방학이 앞으로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니 이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마치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지고 만난 새로운 인간이 너무 별로라고 느껴지지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순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처럼.
신나고 즐거웠지만, 때론 무료하고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지루하기도 했던 어릴 적 방학.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그 소중한 시간도 함께 사라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왜 난 예상하지 못했을까.
2003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땐 토요일도 오전 근무를 하던 주6일제였다. 야근은 일상이었고 회식은 열외 없이 참석해야 했으며, 휴일도 종종 출근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녁이 있는 삶을 얘기하더니 이제는 주5일제를 지나 주4일제를 향해 가고 있을 정도로 근무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주4일제가 된다고 해도 주말이 최소한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짧은 시간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피로감은 조금 덜해졌을지 몰라도 곧 출근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을 만끽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주말 동안 해소되지 못한 스트레스는 찌꺼기처럼 마음 벽에 눌어붙어서 일상의 활력과 에너지의 순환을 방해한다. 점점 의욕이 사라지고 무력감이 커지며, 하루하루가 고되게 느껴지다 못해 마음이 지옥으로 변해 간다면, 그때가 바로 방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나 공황 장애로 상병 휴직을 하는 직장인이 점점 늘고 있다. 마음의 병은 한 번 걸리면 오랜 시간 치료가 필요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면 빨리 병원에 가서 진료받아보는 것이 좋다. 간단한 검사와 상담만으로도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고 휴직과 같이 장기간의 휴식을 처방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에게도 직장생활 18년 만에 휴직의 기회가 찾아왔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방학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다. 휴직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보내야 후회가 없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어떨까, 100대 명산 챌린지에 다시 도전해볼까, 영어 공부만 죽어라 해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특별한 이벤트보다는 일상의 밸런스를 회복하는 것이 나에겐 더 중요했다. 무너진 몸과 마음을 바로잡고 앞으로 10년의 회사생활을 버틸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매일 규칙적으로 독서와 운동을 했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닐 수 있지만 게으르고 싫증도 잘 내는 나에겐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밤새도록 드라마 몰아 보기도 해보고, 도서관, 카페, 쇼핑몰에서 온종일 나에게 자유와 평화를 선물하기도 했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가구 위치도 바꾸고 창고 정리, 화장실 청소, 옷장 곰팡이 제거 등 평소에는 생각도 못 했던 집안일도 많이 했다. 집이 정리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특히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일상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는 건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이들과 산책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영화를 보고, 학원에 데리러 가기도 하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그 시간을 나만큼 특별하게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앞으로 닥쳐올 온갖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나를 지탱해 줄 것이다.
남성 육아 휴직이란 옵션 자체가 없었던 시절에 아이를 키웠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나는 뒤늦게서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후배들은 꼭 육아 휴직을 통해 자녀와 특별한 시간을 갖도록 권하고 싶다.
시간을 쪼개서 아껴 쓰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3개월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일, 미뤄왔던 일, 해야 할 일을 많이 해낸 거 같아서 뿌듯하고, 감사하다. 나는 물론 가족들 행복지수도 높아지고, 서로 간에 배려와 웃음이 늘어났다. 온전히 나와 가족에게 집중했던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설렘, 뿌듯함, 기쁨, 희열, 감사 등 좋은 감정들도 자주 찾아왔다.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직장을 다니면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위시리스트들이 있을 것이다. 직장인에게 주말은 또다시 일주일을 달리기 위한 각자만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최소한의 시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주말 외에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서 나를 인식하고 칭찬하며 안아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직장생활에도 10년에 한 번 정도는 방학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16년간 매년 2번씩이나 방학이 있었던 사람들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