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입장에서 보면 학창 시절에 좀 더 열심히 공부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되는 과목은 단연 국어다.
직장생활의 대부분이 듣고, 쓰고, 말하기로 이루어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직장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예전에는 일할 때 상사의 의중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지만, 요즘은 고객의 소리, 전문가의 한마디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내부의 목소리뿐 아니라 외부의 의견까지 다양하고 정확하게 듣는 능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그러기 위해선 어렵고 복잡한 얘기도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과 식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다양하고 정확하게 들었다면, 이제는 알기 쉽고 보기 좋게 써야 한다.
'사장을 제외한 모든 직장인의 일은 똑같다. 바로 상사를 설득하는 일이다'라는 예전 팀장님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생각해보면 직장에서 보고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보고서를 잘 만들어 상사를 설득하는 일은 회사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보고서를 쓰다 보면 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낀다. 정해진 양식에 적절히 문단을 맞추어 간결하게 표현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다는 건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단순히 국어 실력만으론 어렵다. 그동안 회사생활에서 쌓아온 내공을 집중하여 보고서 한 장에 쏟아부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하기다.
며칠간 야근하며 보고서를 만들었지만, 막상 보고 때 말이 꼬이고 정리가 안 돼서 보고를 망치는 경험은 드라마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보고서는 다소 약하지만, 핵심을 짚는 매끄러운 언변으로 상사의 공감을 불러오는 타고난 이야기꾼들도 있다. 물론 준비는 대충 하고 말만 잘한다고 쉽게 넘어갈 정도의 어리숙하고 쉬운 상사는 별로 없다. 보고 내용에 대한 깊이 있는 준비 없이 완벽한 보고는 있을 수 없다.
해외 영업을 하는 사람은 영어, 연구개발을 하는 사람은 수학과 과학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듣기 쓰기 말하기 능력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 회사생활에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고 확신한다.
고등학교 때 교련 시간에 총검술 시험을 봤던 기억이 있다. 단연 눈에 띄게 절도있게 총을 휘두르던 친구가 부러웠었는데 전쟁 나기 전까지 총검술을 어디에다 써먹겠는가(총에 칼 꽂다가 폭탄 맞는 시대라 이제는 전쟁 나도 못 써먹을 듯). 가정 시간에 배운 박음질, 홈질, 시침질은 단추 떨어지면 한 번씩 써먹긴 한다.
학교에 다닐 때는 수많은 과목 중에 어떤 내용들이 회사에 다닐 때 도움이 될까 고민해 볼 생각도 못 했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같이 직접적으로 회사 업무에 쓰임이 있는 과목들 외에도, 윤리는 더불어 사는 법을, 역사는 지혜롭게 살기 위해, 음악과 미술은 풍성한 일상과 교양을, 체육은 건강함과 즐거운 삶을 위해 필요하다. 이렇게 과목마다 배움의 소중한 이유를 알았더라면 수없이 반복되던 수업 시간을 조금 더 진심으로 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걸음마만 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배우는 듣고 쓰고 말하기가 사람들마다 이렇게까지 능력의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이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언어 능력의 차이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확연했던 것 같다. 수업 시간마다 발표에 적극적이면서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할 줄 알았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공부를 잘하고 책을 좋아했으며, 생각의 폭이 넓었고 어른스럽게 얘기했다. 직장생활도 비슷한 것 같다. 듣고 쓰고 말하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열심히 듣고 쓰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화룡점정인 읽기. 읽는다는 건 우리의 사고의 자양분을 계속 공급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꼭 책이 아니라도 좋다. 신문도 좋고, 자료도 좋고, 다른 사람의 보고서도 읽으면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면서도 유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사람들을 집중시키고 빠져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말을 하면서 연속적으로 다음 할 말들을 정확히 정리하여 이어간다는 건 고도의 사고력이 필요하다.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말하기 전에 읽고 듣고 쓰는 연습이 된 사람들이다. 읽고 들으면서 자양분을 얻었다면 쓰면서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일기도 좋고, 에세이도 좋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는데 글쓰기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보고는 항상 긴장되고 두려운 일이다. 분명 오랫동안 했던 업무이고 내가 가장 많이 아는 일인데도 보고자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보고도 많이 하다 보면 실력이 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상 못한 질문에도 정확히 핵심을 담아 답변하고, 어렵고 복잡한 내용도 귀에 쏙쏙 박히게 설명하는 능력은 머릿속에 충분한 소스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소스는 읽고 쓰면서 만들어진다.
통찰력 있게 듣기 위해, 간결하게 쓰기 위해, 매끄럽게 말하기 위해 그래서 난 다시 공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