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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배의 생각나눔집 Dec 10. 2020

아인슈타인도 후츠파정신이 있었다?

아무리 운이 와도 실천이 없었다면 행운을 잡을순 없을것

“아인슈타인의 전쟁”은 내가 처음에 읽었던 벽돌책 사피엔스가 생각날정도로 책난이도는 정말 어려웠다 이 책의 한줄평을 하자면 앞 표지처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그 아인슈타인이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과학이 평화에서 전쟁으로, 그리고다시 평화로 돌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19년에 아인슈타인은 겨우 마흔 살에 불과했다. 우리가 우리 머리속의 나이든 아인슈타인을 과거로 투사하는 이유는 그가 항상 위대한 현자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신화적인 천재는 잔혹하고 절망적이었던 전쟁 시기에 나왔다. 아인슈타인의 승리가 그토롤 놀라웠던 것은 바로 그런 참혹한 경험들과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그 승리는 순수한 사고와 과학적 미 의 승리, 그리고 문명 자체가 위험에 처한 것 같아 보였던 시기에 있었던
세계 평화의 승리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장벽

유럽을 철저히 파괴한 산업화된 살인,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아인슈타인이 가장 생산적(59개의 논문)이었던 시기와 일치했다. 그가 자신의 이론과 벌인 싸움은 당시 알려졌던 것처럼 그 세계대전의 경과와 불가분하게 묶여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검증하려고 했던 과학자들이 첩보원이라는 혐의로 체포됐고, 학술자들이 적국의 선전이라고 금지당했으며, 동료들이 참호 안에서 죽어 갔다. 무엇보다 아인슈타인에게.  
좌절감을 안겨 준 것은, 가시철조망과 u-보트에 의해 가장 중요한 협력자와 단절되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이 협력자는 상대론의 진리를 세상에 납득시킨 사람, 에딩턴이었다.

베를린에서는 대규모 식량 시위가 매일같이 일어났고, 때로는 전면적인 폭동으로 발전했다.
이런 위험 때문에 많은 농부가 자신들의 생산물을 도시로 가져오기를 중단했다. 군은 1916년 경제를 장악한 후 농장에서 바로 식량을 압수하여 배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군의 효율성 일부가 식량 배급에 적용되기를 바랐다. 현실에서는, 군이 가장 좋은 식량을 가져가고 철도를 독점하면서 모든 것이 더 악화됐다. 빈약한 식생활과 집중적인 연구의 조합은 아인슈타인에게 타격을 입혔다.

스페인독감

전쟁이 유행병을 발생시킨 건 아니었겠지만, 전시의 환경은 그것을 전 세계적 유행병으로 발전시켰다. 병사들의 이동은 격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미국군은 이미 감염된 수송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남성들은 상상 가능한 최악의 위생 환경을 가진 비좁은 참호 속으로 쑤셔 넣어졌다. 나중에 보니 기아에 허덕이던 독일 국민들은 저항력이 거의 없어서 완벽한 바이러스 배양기가 되어 있었다. 서구 문명은 기관총과 가시 철조망을 발명할 필요도 없었다. 총알 하나 쓰지 않고 5000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아인슈타인이 간 질환 때문에 이미 병상에서 꼼짝 못 하고 있었다는 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사람과의 접촉이 거의 없으니 이 새로운 질병들에 걸릴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전쟁에서 “국군주의”와 “과학자”들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강제한 고립도 주위에서 점점 치솟는 애국심을 가릴 수는 없었다.
베를린에 계엄이 선포됐고 어디에서나 국군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거리는 새로운 전쟁 소식이 없나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흥분이 군중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떤 기자는 이렇게 썼다
(개인은 사라졌다. 지성인은 불안해하고, 특별히 교양 있는 사람도 감정의 자제력을 잃고 일반 대중에 종속됐다.) 아인슈타인이 목격한 대로, 이 일은 정확히 주위 동료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알던 가장 품위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무분별한 학살’을 외치는 집회에 나갔다.
민족주의가 합리주의를 대체했다. ‘끔찍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과학자들은 분쟁 전 자신들이 연구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전장에서의 새로운 요구에 맞게 응용하는 일이 흔했다. 전자기학을 연구했던 사람은 이제 라디오 안테나를 만들었고, 운동학 전문가는 이제 탄도를 계산했다.

과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기념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것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옳다는 것에 확신을 갖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풀어야 할 새로운 퍼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질산염 공급 봉쇄와 그 문제를 해결한 과학자 하버

하버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은 암모니아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었다.
수소 원자 4개를 질소 원자1개에 연결시키는 일이 뭐 그렇게 흥분할 일인가 싶을 수 있으나,
이것은 인간이 농업 비료 같은 화합물 생성에 필수적인 화학 결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 준 사례였다. 이 일이 있기 전 인류는 이결합을 일으키기 위해 느리고 변덕스러운
자연적 과정에 의존해야 했다. 이제는 화학 결합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료를 만들 수 있다면 폭탄도 만들 수 있었다.

이들 베를린의 화학자들은 폭탄 생산에 걸림돌이었던 문제를 거의 군부가 알기도 전에 본질적으로 해결했다.  정부는 과학자들을 굉장한 문제 해결사로 인식하게 되었고,
전쟁을 간단한 해결책들로 극복할 수 있는 일련의 기술적 도전으로 보게 되었다.



화학무기로 인해 사실상 국제 과학계의 협력 중단

전쟁 때문에 중단된 매체는 출판물뿐이 아니었다. 수년간 에딩턴 같은 국제적인 천문학자들은 관측과 발견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릴 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신망에 의존했다.
이 ‘과학 관찰자’시스템은 특별한 암호 체계를 이용하여 방대한 양의 천문학 데이터를 효율적인 형태로 압축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과학적 연구에 대한 선취권을 빠르면서도 더욱 신뢰성 있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암호화된 전신은 독일 킬에 있는 허브로 보내졌고, 그런 다음 전 세계의 천문대로 유포됐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전신선이 끊겼다. 천문학자들의 능률적인 시스템은 무력화되어 버렸다.

독가스는 곧 명백히 ‘과학적인’ 무기로 인식되었다. 양측 참호에서는 그것이 하버의 천재성으로만 만들어진 생산물로 비쳤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것은 화학 염색 산업의 생산물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았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여겨지게 되었다.


책임은 화학자들에게 있었다. 독일 쪽에서는 이것이 하버에게 포상을 줘야 하는 일이었지만, 연합국 쪽에서는 그를 향한 분노를 의미했다.


화학 무기의 뚜렷한 과학적 특성은 ‘93인의 성명서’이상으로, 전선을 가로지르는 협력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국제 과학계는 작동이 중단됐다.


“편지봉투를 열어 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에딩턴이였다는 행운”

편지 봉투를 열어 본 사람이 에딩턴이었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은 더할 나위 없이 운이 좋았다. 전쟁중 그 시점에서는 영국 과학자 어느 누구도 독일인의 이론에 대해서 생각조차 해 볼 의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인 에딩턴은 그럴 의향이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일반 상대론의 기본 원리들까지 이해할 역량을 갖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쉬운길을 두고 어려운 평화주의자를 선택한 에딩턴 그과정속 에딩턴 또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저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입니다.

하워드는 즉시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다루고 잇는 주제는 에딩턴의 과학이지,
그의 종교가 아니었다. 천문학자 에딩턴 본인은

 그 차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과학자가 종교적 신념을 주장하다니,

당국자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분명히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 아닌가?

에딩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학과 종교 모두에 근거한 청문을 요청함으로써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

에딩턴의 마지막 청문회가 수월했던 것은 분명히 

다이슨이 해군성 인맥을 통해 개입한 덕분이었다. 에딩턴이 대학 측에서 마련했던 합의를 받아들였다면, 국가적 중요성에 의한 면제를 받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다이슨이 주선한 것은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 차이는, 다이슨과 그의 해군성 지인들의 

도움으로 받은 면제에서는 에딩턴이 계속해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선언 없이는 과학적 업무를 이유로 면제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받은 면제안 속에는 평화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어떤 요소가 틀림없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상대론을 검증할 수 있는 1919년 일식이었다.


운보다 중요한건 역시 실천이다!!

물론 행운도 약간 따라 주었다. 날씨와 전쟁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모든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운이 필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되도록 실행한 것이었다. 일식 원정은 독일-영국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에딩턴이 심혈을 기울여 그렇게 만들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과학계 내의 국군주의와 맞서 싸우기로 선택했고 이 상징성이 설립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것은 우연도 아니요, 요행도 아니다. 이것은 과학이 전쟁이라는 깊은 구렁을 건넌 위대한 순간이었다. 어떤 과학자들이 그렇게 되게 했기 때문이다.



과학에도 정치가 있다고?

과학과 정치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지는 명명백백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분리돼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정치가들은 과학에 관여해서는 안 되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이 분리라는 발상은

거의 완전히 유기되었다.
학술지 구독이 누구에게 허용되었나 하는 것은

정치적인 질문이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누가 받는가 하는 것은

정치적인 질문이었다.
실험 기구를 설명하는 데에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정치적인 질문이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그때는 전쟁이었고 아무것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변칙적인 종류의 과학이었다고.

그렇지 않았다. 과학에서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정치적 측면들이 전쟁 때문에 부각됐을 뿐이었다. 과학이 비정치적이길 바란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정치적 측면들을 무시하는 대신 그것들을 인정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편이 더 나을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달라진다.


과학에는 어떤 종류의 정치가 있을까?”


여기에 옳은 답은 없다. 과학자라는 것에, 당연한 혹은 기본적인 정치적 설정이 함계 실려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과학자가 인간인 한 과학에는 정치가 존재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정치적 가치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과학에 많은 다양한 관점과 여러 가지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과학 안에서 자유 진보적 가치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지금의 아인슈타인이 된 이유

에딩턴이 평화주의에 관심이 없었다면 1919년의 상대론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인슈타인이 일약 스타가 되기에 딱 맞는 조건을 갖췄던 것은,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울러서 사람들이 과학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책을 읽고 나서 느낀점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이여서 아인슈타인이 메인으로 나올줄 알았는데 내가 느낀점은 아인슈타인도 대단했지만 지금이 아인슈타인을 만들어 준것은 옆에있었던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이 또한 운의 요소가 많았지만 결국 그 운을 행운으로 만든것은 실천력이였다.



전쟁상황속에서도 이러한 업적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서
현재 코로나 상황에 의해 행동에
제약이 생긴건 맞지만
그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낙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실천”을 하는 후츠파의 정신이
생각나는 책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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