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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배의 생각나눔집 Nov 28. 2020

시간과 노력만으로 능력을 본다면 과연 공평할까?

능력주의는 생각보다 누군가에겐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

공정하다는 착각 짧은 소감 요약: 내가 지금 잘살고있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힘이 아니다 만약 다른사람이 힘들어하고 괴로운것은

순전히 그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다


만약 어떤사람이 삶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단순히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래

그러게 좀더 노력했어야지 같은 생각 내 경험에 의한 확증편향에 사로잡히지 말것!! 자유주의의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오늘과 같은 글로벌한 기술 시대에는 고등교육이 신분상승과 물질적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는 길이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신분상승을 위한 고른 기회를 통해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 한가지 놓친 점은 능력주의 중심 사회에 내재한 ‘모욕’(insult)의 감정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것인 반면 자신의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은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 능력 지표 따내기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다. 명문대 간판이 줄 수 있는 ‘능력의 지표’ 말이다.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비록 완벽하게 실현된 능력주의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먼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운수와 선택 이런 ‘책임의 분해 관찰’은 민주 시민이 서로에게 져야 할 책음을 받아들이기에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는 우리의 시민적 상호책임 근거를 동정이나 연대성이 아니라 ‘대체 그들은 어쩌다 저 꼴이 되었대?’ 하고 먼저 따지는 것에 둔다 둘째, 현명치 못함에 대한 그런 엄격함만이 문제가 아니다. 행운 평등주의자는 공적 부조의 적격 대상자에게도 굴욕을 안긴다. 그런 사람을 ‘대책 없는 희생자’로 못 박음 으로써 말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결론이 뭔데??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핵심 문구!!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그 유혹은 계속해서 우리의 저항을 깨트리려 한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있다 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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