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멍청한가?
이 책을 읽으며 대중은 정말 멍청할까? 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던것 같다.
어릴때 나는 학교에서 나 빼고 다들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던적이 있었다. 그 이유중 하나로는 수업중에 조용히 하지않아서 선생님이 화나계셨는데. 3분을 못가서 다시 시끄러워져서 선생님의 화남과 동시에 또 다시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상황에서 주로
“아… 조용한걸 3분을 못가네… 선생님 화나계신거 안보이나? 생각이라는걸 하는걸까?” 와 같은 생각을 했던적이 꽤나 많았는데 이 책에 한 문장이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그렇게 모두가 “인간이 구제하기 힘들정도로 비합리적이고 맹신적이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재밌는 조건이 덧붙는다. “나는 빼고!”
학력을 불문하고,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가 “나는 빼고!”라고 말한다. 그럼 누구도 남의 말을 쉽게 믿는 맹신자가 아니다. 재밌지 않은가? 이런 말장난으로도 앞의 통념은 부인되지만, 저자는 인지과학자답게 역사학부터 인류학까지 최신의 연구를 근거로 ‘인간은 어제 태어난 하룻강아지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숙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흥미진진하게 풀어간다.
이해관계
그럼 언제 대화 상대는 우리를 속이지 않을뿐더러 적절히 조언하려고 상당한 노력까지 기울일까?
간단히 말하면, 그들의 이익과 우리의 이익이 맞아 떨어질 때이다.
요컨데 우리가 더 나아지면 그들도 더 나아질 때이다. 여러 개체 간의 이해관계 혹은 동기가 일치하는데는 대략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이해관계가 자연스레 일치하는 경우다. 예컨대 당신과 친구가 함께 빨래 건조대를 옮겨야 한다면, 둘에게는 동작을 맞추고, 건조대를 동시에 들어 올려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최대한 힘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공통된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이해관계는 거의 자연스레 맞춰지지만,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이해관계를 맞추는 멋진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 방법이 바로 ‘평판’이다.
평판의 중요성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도 신뢰할 수 없는 감정 신호를 보내는 어른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결국 감정 신호의 안정성을 결정하는 열쇠는 이렇게 정리된다. 많은 신호가 완전히 무시되고, 신호를 남발하는 사람은 결국 대가를 치른다. 신호를 남발한다고 물리적 체벌 같은 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평판이 나빠진다. 약속을 번질나게 어기는 사람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신뢰할 수 없는 감정 신호를 보내는 사람은 감정 신호를 보낼 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가 다른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쓸 때도 신뢰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배타적인 낙인이 찍히면 그가 얼마나 박식할지라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물론 이름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메시지의 신뢰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주려면 그 이상의 것을 해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좋은 논증, 관련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과거의 좋은 실적 등은 신뢰성을 더해준다. 하지만 신뢰가 논증 전개의 장애가 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우리가 논증의 전제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많은 논증에 대해 전혀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자폐증과 백신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입증하는 연구들이 존재하고 믿을 만하다는 논증을 생각해보라. 또 최고로 박식하고 유능한 강연자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에 무심한 사람이란 낙인이 찍히면, 누구도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의견이 일치하면
사소한것은 거의 무시한다.
따라서 대중 설득의 패턴은 일반적인 맹신과 다르다. 오히려 대중 설득의 패턴에는 교환되는 정보에 대한 신중한 평가가 읽힌다. 사람들이 어떤 메세지가 자신의 기존 의견과 맞아떨어지는지, 또 그 메시지가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나온 것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어떤 후보를 찍겠다고 마음을 굳힌 뒤에는, 선거 운동에 돈을 쏟아 부어도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 광고된 상품을 직접 경험해본 소비자에게 광고는 그야말로 낭비일 뿐이다.
투표자가 중요한 쟁점에 대해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는 공약을 내세운 정당을 선택하고 나면, 그 후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쟁점에 대해서는 그 정당의 뜻을 따르는 것과 같다.
이익을 위해서는 굳이 객관적일 이유가 없다.
누군가를 편드는 행위에는 비용이 따르기 때문에 갈등의 순간에 많은 것이 드러난다. 우리가 편들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행동을 배척의 명백한 신호로 해석하며, 우리를 협력하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동반자로도 해석한다.
최소한의 비용을 치르며 누군가를 편드는 전략은 소셜 미디어의 유명인사 및 전문가가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이고, 심지어 뉴스 채널에서도 번질나게 사용된다.
미국의 케이블 뉴스 네트워크가 좋은 예다.
오랫동안 미국의 뉴스 네트워크는 시청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목적에서, 누구편도 들지 않는 객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전략을 바꾸었다. 시청률을 확보하려고 파편화된 시장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전략을 버리고, 폭스 뉴스는 보수적인 공화당 지지자를 목표로 삼았고, MSNBC는 진보적인 민주당 지지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두 방송국은 편향성이 더욱 짙어졌고, 그 결과로 어느 쪽을 편드는지 확연히 드러났다.
그 채널들과 방송 진행자들은 편향성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지만, 편향성을 띠어 얻은 이익에 비교하면 그 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들이 응원한 쪽으로부터 얻은 이익이, 상대편 시청자를 포기해 잃은 몫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결국 신뢰와 믿음으로 귀결된다. 누구를 신뢰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까?
다른 사람들을 우리 뜻대로 끌어가기는 쉽지 않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동의할 확률을 높일 방법은 진위와 상관없이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고, 현실, 즉 사실과 냉정하게 충돌하지 않는것이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라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잘못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상대가 잘한 부분을 강조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말, 혹은 보도가 사실이고 진실일까? 결론적으로, 거짓의 반대는 진실이 아니고,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다.
스펙트럼에는 양끝의 흑과 백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폭넓은 중간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양극화는 없다. 양극화되었다고 염려하는 평론가들이 한쪽에 치우쳐 있을 뿐이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담기엔 무리가 있어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정리를 해보면
대중을 설득하려면 그들중 설득하려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하고, 아무리 박식하고 유능해도 배타적으로 행동해서 사람들의 평판을 얻지 못하면 그의 말은 설득력이 떨어지게 되며 신뢰도 또한 떨어진다.
그리고 너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세보다 그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듣고 싶은말’을 거짓이 담기지 않은 상태로 하다보면 그들이 우리에게 동의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사소한 작은 문제들은 무시하고도 지지해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배운내용을 가지고
나는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볼것인가?
나만의 색깔을 가진 컨텐츠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말” 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될 수 있을까?
만약 나의 색깔이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린다면 어느정도 ‘불호’에 대해 줄일방법도 찾아봐야겠지만. ‘호’를 보내는 사람들을 잘 이끌어갈 수 있다면. ‘불호’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기보다.
그저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에게 더 신경을 쓰다보면 결국 호가 불호를 상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