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
언젠가 우연히 바운더리에 관한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적은 글을 보면 나는 늘 인간관계에서 오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허덕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떤 부분에 감사함을 느끼는지, 내가 어떤 부분에 불편함을 느끼는지.
이렇게 적립하다 보면 나의 선을 확인할 수 있다라.
또, 이 선은 분필로 그린 선과 같이 선명하지만 쉽게 지우고 새로이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입체적이다. 어떤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 내 행동은 다르다.
첫 사회생활은 나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주었다.
그전까지는 누군가의 선택들로 삶이 이루어졌고, 간혹 나의 주체적인 선택이 들어가더라도 그 책임은 나의 몫보다는 나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의 어깨로 올라갔었다.
처음 선택한 나의 직장, 내가 내는 생활비, 내가 고르는 나의 모든 것들에 책임이 따랐다.
처음 지게 된 선택으로 인한 무게는 생소하고 무서웠다.
대부분의 나날이 그 무게에 짓눌려 눈물로 추출되었다.
나의 말, 나의 행동은 곧 온전히 관계에 영향을 미쳤고, 주체적이지 않다면 길을 잃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마음을 주는 법을 삭제했다. 적당히 마음을 주고,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만 책장을 채우듯이 사람을 대했다. 아둔한 사고였다.
나보다 곁에 몇 없는 사람들을 챙기기 급급했고, 내 안에서는 나보다 그들이 차지하는 영역들이 점차 커졌다.
그러다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을 겪게 되면 극도로 민감해졌다. 겪어가며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겪기 전에 차단하기 급급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얇고 부러지기 쉬운 나뭇가지였던 것 같다. 상처를 받지 않는데만 집중을 하다 보니, 점점 더 얇아졌을 것이다.
어느 순간 확연히 느껴진 경도에 위태로움을 느꼈다.
'많이 흔들리는 나무일수록 부러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구에 등장했을 때부터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고유의 특성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상처도 나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했다. 누군가를 겪어야만이 나의 바운더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해야만 나는 내성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존재임을 받아들였다.
나 또한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 수도, 누군가에겐 기피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듯이.
누군가도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 수도, 나에겐 기피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약속이 많은 날이 있으면,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충분히 가진다. 사람들을 겪으며 교류의 깊이를 더해가는 작업만큼은 쉽게 싫어할 수 없다. 그렇게 나에게 쌓여가는 것들을 사랑하기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처를 받고 잘 아물 수 있는 방법들을 잘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소재처럼 회귀란 단순한 인간의 욕망을 다룬 것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과거는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나도 없었던 사람이 될 수 없다. 나의 선택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삭제할 수 없다. 그럼 노력할 수 있는 것은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책임을 져서 그 선택을 잘 끝내는 것.
얇은 샤프심으로 여러 선을 겹쳐 그리는 게 내가 그리는 길이다. 나의 선택들은 하나가 아니니까.
하지만 잠시 멀리서 그 선을 보았을 때, 하나의 기둥의 형세를 하고 있을 것이다.
완전히 일관되지는 않지만 나는 유연하되 하나의 길을 그려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그 모난 부분이 완전히 둥글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세히 다듬어 가는 과정일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