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일기

향수

by 윤과 슬

전국이 폭설이라는데, 눈이 잘 오지 않는 이곳은 걱정이 없다.

그래도 뭐가 오기는 오려는 모양인지 온 땅에 구름냄새가 한껏 배였다.

괜히 큰 숨을 마시며 집을 나선다.

고향에 가면 꼭 방문하는 곳들이 있다. 카페 한 곳, 맥주 집 한 곳, 간단히 식사를 할 수 있는 한 곳.

라테보다 어쩌면 플랫화이트보다 우유가 적게 들어가서 원두의 향이 더 짙게 느껴지는 커피를 좋아한다. 아메리카노의 강렬한 맛보단 부드럽게 싸고도는 우유를 더 좋아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익숙해진 입맛이라 그런가. 어딜 가도 이 충족감을 주는 곳이 잘 없다.

부러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서서 카페에서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조금 앞에 보이는 북적이는 카페풍경에 들고 나온 노트북이 무안하다. 주문을 넣자마자 운 좋게 자리가 난다. 진한 커피와 적은 우유 탓에 한 잔은 살짝 아쉽다. 야금야금 두 잔을 마시며 작업을 끝내고 나서야 만족스레 자리를 뜬다. 아아, 제발 우리 집 앞에 있었으면.

연이어 비가 내리려나 보다. 결정이 느껴지지 않고, 스미듯 내리는 비.

그 덕에 우산 없는 손이 무색하지 않다. 목에 둘렀던 머플러를 머리까지 두른다.

시간개념 없이 지내는 사람이었다면 새벽인지 와리가리 했을 풍경이다.

짧게 울리는 진동에 주머니에 애써 넣어놓은 손과 스마트폰을 꺼낸다.

이미 도착했다는 친구의 말에 얼마 남지 않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부러 시간을 내는 것에 서로 고마워하는 사이. 내 시간을 존중하는 이를 만나 보내는 시간은 곱절로 행복해진다.


맥주의 향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에일, IPA는 뭔지도 모르고, 그저 쓴맛에 인상을 쓰기 바빴는데. 이젠 그 쓴맛을 씁쓸함이라 부르고, 그 뒤에 숨은 향을 좋아하게 되었다. 갓 구운 소시지나 만두와 맥주 한잔이라니. 절로 잡힌 주름이 퍽 만족스럽다.

적당히 부른 배와 아쉬운 헤어짐에 반가운 얼굴들이 있는 식당을 향한다. 꽂히면 질릴 때까지 가는 탓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과한 친절 없는 그곳이 좋다. 제철재료와 허브들을 잘 다루는 탓에 언제나 실패없는 곳. 좋아하는 브랜드의 맥주도 취급하는 터라 안 갈이유가 없는 그런 장소다. 최근 들어 웨이팅도 해야 하는 맛집인데 한차례 둘러오니 자리가 생긴다. 양고기가 들어간 스튜, 살짝 쌉싸름한 에일이 내일의 숙취를 한 층 가라앉힌다.


과하게 취하지 않는 날이다. 이런 날이면 밤새 잠을 뒤척이는데, 내일 쉰다고 생각하니 그저 편하게 엄마 곁에 찬 발을 쑤셔 넣는다. 소리 지를 법도 하건만 찹다면서 오히려 더 감싸주는 체온에 눈이 감긴다.

어떻게 그리 잠이 잘 오는지. 늦게 귀가한 탓에 소음을 일으켰던 동생이야기도 내게는 금시초문이다. 내 몸도 아니라고 하지만 여기가 제집인지는 아는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서 곁에 있어줄 가족들이라 그런가. 또 틈새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며든다.


하늘에 구름이 번지듯, 자연스러운 온기 속에 언제고 다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는 나의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