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제주2
그런 날이 있다. 왠지 모르게 여유로운 아침에 천천히 준비를 하고.
나갈 때가 되면 이상 시리 뒤통수가 간지러운 날.
뭘 두고 나왔지?
가스 잠갔고, 냉장고 문 잘 닫혔고, 현관문 잘 닫았고.
없어서 큰일 날 것만 아니면….
“없으면 사지, 뭐”
만능 주문을 걸고, 길을 나선다.
아, 이어폰.
괜스레 허탈함이 몰려와 헛웃음이 난다.
사긴 뭘사…. 출근길에 이어폰을 어디서 사랴?
근거 없던 만능 주문을 탓한다.
어쩔 수 없지, 뭐.
좀처럼 보지 않던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오랜만에 듣는 출근길 소음이 다소 새롭다.
내 귀로는 부족해 타인의 귀까지 침범하려는, 반이상이 소멸된 옆사람의 음악.
아침부터 달달한 어느 이의 전화소리.
이 꽉 찬 도시에서 섰다가 달리다가 경보음처럼 내릴 곳을 알리는 버스소리.
이어폰 하나 없을 뿐인데, 많은 소리가 들린다.
핸드폰 하나 넣었을 뿐인데, 많은 것들이 보인다.
예전에 제주에서 버스를 타며 적었던 글이 떠올랐다.
내가 보는 생소하고 기분 좋은 것들이 누군가에겐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풍경이라는 게.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낮은 건물들, 길가에 서있는 나무들, 낮은 돌담, 무엇인지 모를 식물을 심어놓은 밭. 이어폰을 타고 흘려들어오는 노래 밖으로 뒷자리에 앉은 부부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들 중엔 밖의 풍경이 차지하는 비율이 없다. 그저 현실에 대한 대화.
나와 그들 사이에 있는 등받이가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되었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의 낭만 안에서 그렇게 현실의 경계선 뒤에 있었던가.
숙소에서 출발한 지 1시간이 다되어 가지만, 일단 오른 버스라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있다. 목적지에 가는 버스겠지. 화순리에서 사계로 가는 버스는 잘 없나. 버스의 안내창을 유심히 본다.
그러다 한 정거장에서 다리가 불편하신 어른이 탔다. 자주 마주친 건지 생면부지한 남인지 모르겠지만 기사와 눈인사를 한다. 잰걸음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모습에 버스가 출발하면 안 되는데. 조바심에 시선을 백미러로 옮겼다.
앞만 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버스기사는 무심한 듯 유심히 노인을 보고 있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고 가슴이 뻐근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늦든 말든 아무런 신경도 안 쓴다고. 그냥 먼 산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