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진 Jan 31. 2024

버피테스트와 오체투지의 상관관계

6개월만에 버피테스트를 하다 깨달은 것


1. 나는 왜 운동을 알려주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았는가

  재작년부터 체지방 30kg감량하여 체지방량이 10kg남짓, 근육량 28kg에 육박하는 강인형 몸매가 되면서 주변에서 수많은 질문을 받았다. -지금은 다시 요요가 왔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운동했는지, 어느 헬스장을 다니고, 무슨 단백질을 먹고, 어느 태닝샵을 다니는지... 나는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똑같은 대답을 수도 없이 해주었다. 그들이 나만 보면 그런 부류의 질문들을 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같이 가서 알려주기도 했다. 크로스핏 박스에서는 거의 내가 근력운동 코치처럼 자꾸 알려주게 되어 나중에는 헬스장에 피신해서 운동해야 할 정도였다. -다른 이를 알려주다보면 내 운동을 못하게 된다- 그런 상황들이 반복되다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근황이나 깊은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그런 쪽으로 대화를 하게 됐는데, 막상 돌아서면 어떠한 변화도 없었던 것이다.

  그 점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대화야말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기분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변한 나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 그런 종류의 질문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변할 정도로 운동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내가 백날 운동 방법이나 식단 구성에 대해 떠들어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 한 가운데 근본적인 어떤 것이 완전히 변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나 자체가 180도 변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 시작은 무조건 자기 자신에서부터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거만해보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고리타분한 잔소리로 여길 위험성이 있으므로 나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려 그 상황을 모면하고는 했다.

2. 그러는 나는 어떻게 변했길래

  1번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묘사한 것 같아 변론을 좀 해야겠다. 나는 열등감 때문에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나이는 찼는데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것이 없는 것 같다는 패배감, 평생 한 번도 예쁘다거나 여성스러운 부류에 나를 넣을 수 없었다는 사실, 일을 하기는 하나 나에게 일말의 발전도 가져다주지 않고 매일 소모되고 있다는 불안이 나를 잠식했다. 그런 기분이 최고점을 찍었을 때 몸무게는 85kg에 육박했고, 도처에 할부로 산 물건들이 내 숨을 죄어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변하지 않는 자가 훨씬 더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변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싫어서. 열등감을 동력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나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트레이너가 정해준 식단과 운동을 병행했다. 지난날의 내 삶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차근차근 삶을 복기해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적은 식사와 운동 따위는 심한 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죄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으니 그것조차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완전히 막다른 길에 있었으므로 트레이너의 눈을 피해 뭔가 먹는다거나, 뭔가 일탈을 시도할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매일 주어진 형벌을 살아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대목에서 주변 사람들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야?" 내가 정말 수도 없이 들은 말인데, 이유는 알 수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딱히 범법을 한 것도 아니고, 알바며 학교며 바지런히 살아온 것도 사실이지만, 20대 막바지에 인생을 완전히 잘못 살았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나중에 가서 우울증 진단을 받기는 했지만.

3.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게 오늘의 본론이다. 약 6개월만에 다시 살을 빼보려 버피테스트를 시작했는데, 내가 이 운동을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떠올랐다. 운동에 미쳐있는 크로스핏터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그 동작. 심지어 와드-매일 운동 계획-에 버피테스트가 있으면 안 나오는 사람도 많았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버피테스트가 좋았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와 땅만 남는 느낌이랄까... 뭔가 연상되지 않는가. 바로 '절'이다. 버피테스트는 불교식 절, 극단적으로 '오체투지' 동작을 연상케 한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는 약간 전율했다. 정말 내가 종교인이 되려는건가. 왜 이러는 걸까. 나도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버피테스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완전히 항복하듯 엎드리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그 순간만은, 아득바득 '나'라고 우기며 꾸며낸 나, 혹은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내려놓고나면 그것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실감하게 된다. 내가 뭘 그리 잘못 살아왔느냐고 물으면 그저 웃을 수밖에 없겠지만, 사실, 뭔가 먹어대거나 물건을 사는 행위가 다르게 말하면 욕심이 아니겠는가. 욕심은 왜 죄가 안 되는가.

4. 도파민 분비 프로세스

  뇌과학 분야에서 도파민 분비에 관한 학설을 새로 쓰고있다. 사람들은 그저 '쾌락을 쫓는 행위'를 통칭하여 쓰는 것 같지만, 실은 도파민이 분비되는 프로세스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도파민은 말하자면 '기대'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뭔가를 끊임없이 기대하며 산다. 예를 들면, 업무에 시달리면서 퇴근하고 마실 맥주 한 잔을 기대하는 식이다. 그러면 실제로 그 행위를 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족하거나, 실망하거나. 만족한다면 다음에도 힘든 업무 중에 맥주 한잔을 기대하게 될 것이고, 실망한다면 그만큼의 즐거움을 줄 뭔가를 더 찾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기대를 걸고 그 행위를 행하여 충족이나 실망을 확인하는 것. 그 모든 과정이 도파민 분비 프로세스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것이 보상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체벌, 어려운 목표 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만약 숙제를 안 해왔을 때 어떤 처벌이 있다고 치면, 우리는 그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숙제를 할 것이다. 그리고 숙제를 검사받고 처벌 대상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도파민'의 굴레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하게 본다면 '승부'가 아닐까. 사람들은 매일, 매순간 승부를 걸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대했던 것을 충족하거나, 승부에서 이겨도 만족은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승부가 또 시작되기 때문이다. 도파민에 중독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에게 오지않은 어떤 순간에 대해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것. 현대 사회는 우리를 도파민 속에서 살아가도록 내몰고 있다. 우리는 학교를 마치면 회사로, 회사에 들어가면 결혼이나 완전한 독립, 부의 축적에 승부를 걸도록 길러졌다. 우리의 사고 회로는 오로지 그런 쪽으로 움직여서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계획하고 갈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낙오자는 어디로 가는가. 낙오자가 행복할 수 있는 낙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실은 낙오자가 아니라 이미 삶에 주어진 것이 많다는 것,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 인간이라면 어떠한가.

5. 버피테스트 하다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나도 가끔 내가 미친놈처럼 느껴진다. 돌아보면,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하고있는 일들을 죄로 규정하고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것 부터가 그랬다. 다이어트가 끝난 다음에도 나는 운동에 빠져들었다. 오히려 지방이라는 방해 요소가 걷히자 더 많은 시간을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피트니스 대회를 권유하기도 하고, 크로스핏 코치나 트레이너 과정을 밟아보라는 등 다양한 목표를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도 그 말에 흔들려 대회에 도전했지만, 결국 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운동이란 수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자신 안으로 파고드는 일이었지, 남에게 보여주기위해 더 대단한 것들을 해내야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그런 식으로 운동하는 내가 소득없이 표류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내가 왜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운동에 강하게 몰입할 수 있었는지. 나는 사람들 마음 속 어떤 부분을 바꾸면 세상 전체가 요동치듯 바뀔 거라고 믿는다. 방법은 각자가 창의적이고 경이로운 방식으로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를 뭔가 마법적인 요소로 촉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마치 다이어트약을 먹으면 다이어트 될 거라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의 함정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예술, 크게 보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인식의 틀을 깰 것이다. 그것만이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유일하고 건강한 길이다. 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복기하고, 성찰하고, 감사함을 찾게 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사라진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이 맞이할 새로운 세계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