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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 Feb 05. 2021

나의 친애하는 몸뚱이에 대하여

지난 1월 22일부터 식단 조절을 시작했다. 3년 전에 비해 30kg가까이 체중이 불어났는데, 그동안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고 뚱뚱해진 내 몸이 혐오스럽다고 느끼지도 않아서 그냥 살았다. 부모님은 내 허벅지와 뱃살을 보면서, 팔뚝과 등을 보면서 거의 매일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다. 


어휴 저 대단한 허벅지와 엉덩이 좀 보소. 심각하다아아~~ 다이어트 좀 해.


텔레비전에서 솔깃한 다이어트 이야기가 나오면 나한테 전화하거나 내 방에 와서 미디어에 등장한 다이어트가 얼마나 신박하고 효과적인지 계속 이야기하셨다. 난 항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왜냐하면 솔직히 옷 입는 것 제외하고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20대 때에는 옷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몸이 불기도 했고 옷을 사는 데에 드는 돈에 대해서 조금은 성찰을 거쳤기 때문에 예전처럼 옷 앞에서 눈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아주 약간의 절제가 생겼다.) 예전에는 주변 모든 사람들의 체형과 내 체형을 비교하면서 내 몸에서 깎아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매번 되새기면서 살았다. 조금 더 얇은 다리와 허리, 여성스러운 굴곡과 라인 등등 세상에서 '예쁘다', '아름답다'라고 하는 몸에 좀더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스스로를 자책했었다. 


그러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왔고 인생에서 가장 가볍고 마른 모습으로 1년 정도를 살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말라서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옷을 사러 가도 너무 편했다. 입고 싶은 옷은 다 입을 수 있었고 핏도 예뻤다. 그런데 동시에 불안했고 불행했다. 나는 그 때 운동이나 적절한 식이요법으로 그런 몸이 된 게 아니었다. 매일 울고 못 자면서 또는 하루 종일 누워있다가 어쩔 수 없이 뭔가를 먹어야 했을 때 시리얼 한 그릇 정도 먹으면서 지낸 게 6개월이 넘어가자, 몸에 필요한 근육이며 지방이며 이런 것들이 훌훌 빠져버린 상태였다. 조금만 걷거나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다 못해 어지러웠고 침대에서 일어나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서 몇 시간 동안 씨름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모습을 유지하려면 나는 계속 불행하고 잠을 못 자면서 하루에 시리얼 한 그릇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 그건 어딘가 기형적이었다.


다행히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당시 우연찮게 취업이 되어 무조건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먹는양도 조금씩 늘었고 체력도 조금씩 붙었다. 그리고 체중은 급격히 늘었다. 요요현상의 원리가 작용했겠지 싶다. 거의 움직이지 않고 먹지도 않다가 약간 움직이고 보통 수준으로 먹기 시작하니 몸이 미친듯이 음식의 영양소를 저장하면서 차근차근 그러나 빠른 속도로 몸이 커졌다.


처음에는 살을 빼야 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살이 찌고 나서 오히려 덜 힘들다고 느꼈던 것, 그리고 살이 빠진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을 통해 나의 몸에 대해서 엄격하게 평가하는 습관을 버리게 되었다. 누군가의 몸을 볼 때에도 각도기와 자를 이용해서 나와 비교하는 것을 멈추었다. 몸은 그냥 몸이다. 인터넷 세상의 어떤 글귀에는 체형은 그 사람의 생활 습관을 보여준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의 마음이 들었다. 체형이 생활습관을 보여준다는 말은 곧 보기에 멋지지 않은 체형을 가진 사람은 생활습관이 엉망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미디어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몸을 가진 사람들처럼 '자기관리'를 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별로인지 잘 이해를 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마르고 길쭉한 몸을 '우월하다'라고 평가한다. 선망하고 칭찬하고 아름답다고 박수를 보낸다. 물론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그런 몸을 가지게 된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우월하다'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 자체가 크고 비율 좋은 체형과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을 타고난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태생적으로 잘난 것을 으뜸으로 평가하면서 만일 당신이 타고나지 못했다면 후천적으로라도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어느새 그 메시지가 아주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지난 달 22일부터 식이조절을 하게 되었는가, 이 문제를 이야기할 차례가 된 것 같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목표를 지금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 필요한 일이라서 잘 챙겨 먹고 차근차근 체력을 키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몸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함께 지내기 위해 다독거려야 할 파트너이다. 깎아내고 미워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 어쨌든 데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몸과 마음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실제적인 불편함을 겪었기 때문에 개선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말과 시선 때문에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냉정하게 구별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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