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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 Mar 13. 2018

오르락내리락 2

봄날의 라이더재킷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Y를 만나기로 했다. Y도 대학원생이라 매우 바빴고, 이번 학기에는 종합시험도 치러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만나기로 한 지하철역에 바로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그냥 백화점 식당가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밥을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수다를 본격적으로 떨기로 하고, 백화점을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1층으로 가보니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우리는 우산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백화점 내에 있는 카페로 가야했다. 카페는 7층에 있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여성복 층을 지나가는 순간에 세일 판매하는 옷들이 걸려있는 옷걸이에서 붉은색 라이더 재킷(가죽 재킷)이 딱! 눈에 띄었다. 


 아니, 세일하고 있으니까 가격은 보고 지나쳐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방향을 옷걸이 쪽으로 돌려서 옷의 가격을 확인했고, 놀랍게도 그 예쁜 라이더 재킷의 가격은 4만원 대였다. 원래는 거의 10만원에 가까운 옷이었는데 굉장히 할인 폭이 컸다. 그런데 붉은색 라이더 재킷이라니... (빨간색도 아니고, 와인색도 아닌 것이 핑크빛이 도는 레드였다. 아주 오묘한 컬러였다.) 이거 너무 튀어서 몇 번이나 입을까 고민되었다. 혹시 다른 색은 없을까 해서 점원에게 문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본 디자인은 붉은색 밖에 없고, 검정색 라이더 재킷은 세일하는 상품이 아니라고 했다. 


사진 - 유혜인


 흠, 우선은 검정색 라이더 재킷을 입어보기로 했다. 뭐든 기본을 먼저 갖춰놓고 난이도를 높여야 하는 법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다른 디자인의, 세일을 하지 않는, 기본색인 검정색의, 라이더 재킷은 팔과 어깨가 너무 끼고 길이가 배꼽 정도밖에 오지 않을 만큼 매우 짧았다. 나는 허리가 긴 체형이라서 짧은 옷을 입으면 사람이 어중간해 보이기 때문에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이즈가 F였다. 여성복 사이즈 표현 중에 F는 대단하게도 Free를 뜻한다. ‘자유!’ 하지만 절대 하나의 사이즈에 모든 이가 자유로울 리는 없고, 163정도의 키에 44반에서 55사이즈의 가슴둘레 85cm 정도의 여성에게만 자유로운 사이즈이다. 한국 의류업계의 잔인한 사이즈 체계에 또다시 놀라버린 나는 결국 처음의 마음대로 붉은색 라이더 재킷을 입어보기로 했다. 

 붉은색 라이더 재킷은 좀 더 길이가 길고 소매 너비나 어깨도 적당하고 몸에 잘 맞았다. 색이 화려한 대신 디자인을 무난하게 뽑은 것 같았다. 처음 입어봤던 검정색 라이더 재킷에 비해 사이즈도 인간적이고(잘 맞고), 가격도 저렴한데 마지막 의문이 남아있었다. 과연 이걸 평소에 자주 입을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옷들이랑 잘 매치가 될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 마음의 소리를 들으셨는지 점원분이 말씀하셨다. 


 “어차피 간절기 옷은 기본 디자인이든 아니든 자주 못 입어요. 요즘엔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니까. 이런 라이더 재킷은 생각날 때 툭툭 걸쳐주고 겨울 코트 안에 입어주고 그렇게 입는 거죠. 라이더 재킷이 검정색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 보세요.”    


 “사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물론 영업이었겠지. 그런데 일교차가 큰 간절기에는 ‘완벽한’ 외투라는 게 존재하기 어렵다. 하루하루 날씨가 변화무쌍 하니까. 

비가 오는 봄에는 코트나 야상점퍼를 입고, 바람이 많이 부는 가을에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라이더 재킷이나 카디건을 걸치는 게 좋다. 이미 짧은 기간 그렇게 날씨마다 기분마다 다르게 입다 보면 간절기 외투가 세 벌 정도만 되어도 한 벌 당 그리 많이 입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겨울에 코트 안에 입던 니트를 외투처럼 입을 수도 있고, 초겨울에 입을만한 얇은 모직 코트를 얇은 티셔츠나 블라우스와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간절기용 외투는 초콜릿처럼 많을수록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좋긴 하지만, 정작 먹어보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은, 옷 세상의 길티플래져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효율성이나 가성비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간절기 외투는 몇 번 못 입으니까, 아무리 무난하고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옷을 사도 몇 번 못 입을 수 있으니까. 한 벌로 한 계절을 나는 타입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몇 번 입을지 손가락 꼽으며 고민하기보다는 한 번 입어도 멋지게 입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고 즐겁다면 사서 옷장에 걸어두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닐까 하는. 봄가을 옷은 오히려 몇 번 못 입으니 마음껏 살 수 있는 옷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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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절기가 그렇다. 낮에 아무리 날이 좋아도 아침에 춥고 밤에 추워서 겨울옷을 걸치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 잠깐 정오의 햇빛에 속아 얇고 예쁜 봄옷을 입었다가 앞섶을 여미며 욕하게 되는 것. 해가 떠오를수록 따뜻하고 습도도 적당하고 옷 입기에도 적당한데, 해가 지거나 바람이 불면 야속할 만큼 춥고 그런 갑작스런 추위와 바람에 대비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간절기 외투를 찾아 헤매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겨울이 지나 날이 풀리면 몇 번 입지도 않을 봄옷을 사재끼며 즐거움에 차오르는 그 마음을, 그 어리석음을 바보 같다고만 할 수는 없다. 벚꽃 축제에서 죽이는 프로필 사진을 건져보자는 의지가, 그런 사진을 가능케 할 최고의 옷을 찾겠다는 환상과 좌절이 나쁘지만은 않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여름과 몸을 웅크리게 만드는 겨울 사이, 때로는 오르락내리락 해도 순간의 완벽함이 오히려 전부가 되는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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