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希望(희망)

희망하기에 행복한가?

by 지훈

희망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희망이란 결국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본질적으로 시간의 저편,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가능성에 기대어 서 있는 감정이다. 그에 반해 나는 최근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믿음을 지키고 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결국 붙들 수 있는 건 오직 현재뿐이라는 생각. 불교의 제행무상이나 현대 심리학의 마음 챙김이 강조하듯, 지금이야말로 존재 가능한 유일한 시간이라 여겼다.


그런데도, 문득 돌아보면 내가 행복을 느끼던 몇몇 순간들은, 정작 지금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같다. 오늘을 견디게 해 준 건, 종종 내일에 대한 작은 가능성이었고, 지금의 고통을 무시하게 만든 건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희망은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언제나.


그러다 보니, 점점 의문이 고개를 든다.

희망은 정말로 좋은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환상인가?


이 단순한 물음은 사실, 인간 존재의 방식 전체를 묻는 질문이 된다. 나는 희망하기에 행복한가? 아니면 행복하기에 희망하는가? 이 명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희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엇인지 묻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말로 포착하기 어려운 성질을 띤다.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았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희망의 원리에서 희망을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향한 욕망”으로 규정한다. 그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실천의 동력이라고 보았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지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칸트 역시 최고선에 이르는 길에서 희망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 말했다. 도덕적 행위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믿음, 그 보상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우리는 스스로의 윤리를 지켜낼 수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희망을 정반대로 해석한다. 그는 희망을 욕망의 변주, 더 나아가 인간이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고통의 늪이라 보았다. 인간은 끊임없이 바라고, 그 바람은 끊임없이 좌절되며, 그 좌절 속에서 인간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의 철학에서 희망은 존재의 불안정성과 무상함을 강화할 뿐이다.


내가 이런 사유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쇼생크 탈출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내게 인생 영화라 부를 만한 작품. “Hope is a good thing. Maybe the best of things.” 그 대사, 그리고 그 대사를 몸소 살아낸 앤디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게 희망의 본질을 설명해 주는 가장 아름다운 비유였다. 어린 시절 나는 믿었다. 희망하면 결국 원하는 인생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힘들었던 학창 시절, 여러 번 무너질 뻔했던 순간마다 그 믿음은 나를 지탱해 주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상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희망이 나를 살게 해 준 만큼, 희망했던 나에게 세상이 가한 배신은 더더욱 쓰라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희망은 그 기대를 가만히 키워내는 감정이니까. 그래서 어쩌면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희망이라는 감정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희망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희망은 분명히 우리 삶에 에너지를 제공한다. 희망하기에 우리는 어떤 행동을 시도하고, 때로는 삶을 뒤흔드는 결단까지 내리게 된다. 블로흐가 말한 실천적 유토피아는 그 자체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니체가 말했듯, 고통을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는 그 태도 역시, 어쩌면 희망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삶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하며,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힘. 그것이 희망이다.


그러나 희망이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무언가로 만들고 싶어 하고, 그 과정에서 괴로워한다. 희망은 그렇게, 한 손에는 도약의 날개를, 다른 손에는 추락의 돌덩이를 함께 쥔 감정이다. 그래서 모호하고, 그래서 인간적이며, 그래서 더없이 부조리하다.


나는 이제 다시 묻는다.

희망하기에 행복한가?


그 질문은 단순히 감정의 선후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양면성을 마주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희망은 늘 상반된 감정들의 교차점에서 존재한다. 기대와 좌절, 충만함과 결핍, 믿음과 회의가 교차하는 그 모호한 경계 위에서, 우리는 희망이라는 감정을 살아간다.


그 질문의 답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의 모든 층위를 너는 끌어안을 수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희망은 단일한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순을 품은 존재로 살아가는 한, 기쁨과 고통을 함께 감내해야 하는 감정의 총합이다.


그리고 나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행복하기에 희망한다는 말은 어쩌면 잘못된 명제였다는 것을. 행복하다는 것은 지금의 상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고, 희망한다는 것은 아직 충족되지 않은 어떤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 둘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어쩌면 있다. 단, 그것은 지금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일 뿐이다. 그러니 희망은 결국, 행복을 지속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태어나는 그늘이자 빛이다.


“Hope is a good thing.”

나는 이 말을 수없이 곱씹어왔다. 처음엔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읽힌다. 희망이 좋다는 말은 희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선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럼에도 희망을 품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라는 말이다.


현실이 고통스럽더라도, 희망을 품는 내가 아름답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증거이자, 희망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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