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救援 (구원)

믿음, 인간의 특권이자 저주

by 지훈
KAIST 독립 영화 제작 동아리 "은막" 제작, <구원>


인세는 고통의 연속이다. 이 불가해한 삶의 굴레 속에서 인간은 반복되는 윤회를 거듭하며 찰나의 순간에나마 구원의 손길이 닿기를 갈망한다. 고통이라는 무게를 이겨낼 힘은 없을지언정, 그 무게를 덜어줄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열망일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종교는 구원을 천국과 지옥이라는 상반된 상황 속에서 정의한다. 이들 교리에서는 절대자와 그의 대리인이 “구원의 손길”을 통해 인간을 낙원으로 이끄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과연 구원이란 그렇게 절대자의 자비와 힘에만 의존해야 하는 것일까? 절대적인 기준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일까?


구원은 종종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개념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지각하는 상대적 경험이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누군가 작은 변화를 느끼고, 그 변화를 통해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 구원이 된 것이다. 즉, 구원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감각과 믿음 속에서 피어난다. 환경이 바뀌든, 관계가 회복되든, 심리적 억압에서 해방되든, 그 변화가 절망 속에 빛을 던져준다면 그것이 구원의 실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구원이 절대적인 진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내적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믿으며 구원을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더욱 깊은 절망을 느낄 수도 있다. 이렇듯 구원은 철저히 개인의 해석에 의존하며, 어떤 절대적 권위나 외부의 힘이 강요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적 체험이다.



구원자와 인간의 한계


그러나 간혹 자신이 구원자라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구원할 사명을 받은 듯 행동하며,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 변화를 꾀하려 한다.

과연 그들은 진정한 구원자인가?

내 생각에, 스스로를 구원자라 칭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보지 못한 나약한 존재들일뿐이다.

구원의 기준은 철저히 상대적이고, 그것을 느끼는 당사자의 믿음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구원자는 상대가 그를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저 또 다른 인간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구원자의 행위란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구원이란 타인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의 내면에서 변화를 찾고,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 의미를 재구성할 때, 비로소 인간은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



믿음, 인간의 특권이자 저주


결국 구원이란 인간의 믿음에서 출발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특권이자 저주다.

우리는 스스로를 “믿는 존재”라 정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를 이끄는 희망이자, 때로는 고통의 근원이 된다. 믿음은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질문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기도 한다. 우리는 그 질문을 멈출 수 없기에,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기에 끊임없이 구원을 갈망한다.


그러나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선택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본질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나약함 속에서 빛나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을 갈망하며, 또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다.


구원은 특정 종교나 신념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는 변화 속에서, 그리고 그 변화를 자신의 이야기로 해석해 내는 우리의 인간성 속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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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KAIST 직업 학생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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