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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고 이야기] 실패, 실패 그리고 실패

나의 과학고 2학년 1학기 이야기

by 지훈

2021년 초

조기 진학을 준비하던 2021년 초, 나는 이미 1학년 동안 학원 없이 성적을 끌어올린 경험이 있었기에 앞으로도 잘 해낼 거라 굳게 믿었다. 친구 중 한 명은 “너는 이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성적이 더 오르겠다.”며 나를 응원했지만, 사실 나는 이미 내가 이룬 성과들에 자부심이 있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해냈던 내가 학원이라는 새로운 환경까지 더해졌으니, 당연히 더 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 대부분은 조기 졸업조기 진학을 준비하는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나와 협력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칠 상대들이기도 했다. 학원 생활은 이전과는 또 다른 흥미로움을 안겨주었다. 학교에서의 일상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수업이 끝나고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빠르게 사 오는 짧은 일탈 같은 순간들은 나름대로의 행복이었다.


학원 생활 속에서도 나는 공부에 집중했다. 자습실에서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집과 학원의 거리가 멀어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가까운 할머니 댁에서 머물렀다. 조기 진학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대학 수학 내용까지 공부하며, 내신을 위해 미적분, 기하, 확률과 통계 문제를 열심히 풀었다. 생명과학 또한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의 수업을 듣고, 매일 배운 내용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1학년과 2학년 사이의 겨울방학은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2021년 봄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오니 다시 상담의 시간이 다가왔다. 담임선생님은 나의 성적을 보며 “지훈아, 지금 이대로만 하면 카이스트에 갈 수도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카이스트” 중학교 때 처음으로 그곳을 방문했을 때, 과학고 선배를 만나며 “꼭 다시 돌아오겠다”라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 꿈이 정말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그 꿈을 생각하면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정말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개천에서 용 난 사람. 그게 바로 나야.”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2학년 1학기: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시간

2학년 1학기, 나는 세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조기 진학 대상자 타이틀, 내신 성적 상승, 그리고 과학전람회 전국대회 진출과 수상. 모든 것을 이루려던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내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과학고에서의 생활은 단순하지 않았다. 7교시가 끝나면 8교시에 대학 입시 문제를 다루는 특강이 열렸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자습실로 이동해 약 3시간 동안 자습을 한 뒤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기 진학 및 조기 졸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이와 달랐다.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의 내용을 2학년 동안 모두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수행평가와 추가적인 수업들이 자습 시간을 대체했다.

여기에 과학전람회 준비까지 더해졌다. 자습 시간 일부를 할애해 실험실로 이동, 세포를 배양하거나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논문을 찾아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며, 실험 결과를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렇게 내신, 조기 진학, 과학전람회까지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나는, 결국 하루 24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내 시간을 무리하게 쪼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2시, 혹은 1시에 잠드는 일상을 반복했다. 스스로에게 “넌 다 해낼 수 있어”라는 믿음을 주며, 쉬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모든 것을 이루면 그만큼 보상이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중간고사: 예상치 못한 실패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며 맞이한 중간고사. 나는 나름 준비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는 동안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극도의 긴장감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배가 아파왔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것 같았다. 아는 문제도 실수로 틀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시험 후, 나는 수학 과목 성적을 확인하며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내 점수라고?” 점수를 확인해 보니, 단순히 운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내 답이 틀렸다. 이유는 명확했다. 내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학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 진학 1차 시험이 있었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운 좋게도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선생님들의 많은 배려를 받았다. “1차는 통과했으니 괜찮아. 다시 해보자.”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하며 다음을 준비했다.



지구과학 수행평가

중간고사를 치른 뒤에도 일상은 계속됐다. 성적에 대한 실망과 불안 속에서도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졸업앨범 촬영이 진행되었다. 긴장되고 힘든 일상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웃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은 작은 위안이 되었다. 어색한 포즈를 취하며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날은 잠시나마 모든 걱정을 잊게 해 줬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매년 열리는 과학축전 준비였다. 과학고 학생들이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과학 실험과 시연을 선보이는 행사로, 학교의 전통이자 자부심이었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팀을 이루어 중학생들에게 보여줄 실험 내용을 기획하고, 발표 자료를 준비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과학축전을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동시에 즐거움과 보람도 있었다.


중간고사의 실패와 조기 진학 준비의 압박 속에서도, 졸업앨범 촬영과 과학축전 준비는 내게 소소한 일상의 활력을 주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친구들과 웃고, 함께 땀 흘리며 준비했던 시간들은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런 숨통조차도 내가 마주할 더 큰 시련 앞에서는 잠시뿐이었다.



조기 진학 실패와 무너지는 꿈

2021년 7월 15일,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선배들이 학교에 방문해 대학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날이었고, 친구들과 함께 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어떤 선배들이 올지,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울지 상상하며 잠시나마 모든 스트레스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2학년 학년부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지훈, 2학년 실로.”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은 “왜 부르신 걸까?"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고, 나도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복도를 걸으며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조기 진학 2차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혹시 시험 결과와 관련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2학년 실 문을 열었다.


문 안에는 담임선생님들과 학년부 선생님들이 모두 앉아 계셨다. 방 안의 공기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선생님들 모두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학년부장 선생님의 한 마디였다.


“지훈, 화학에서 5점이 모자라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5점. 단 5점이 모자라 조기 진학 대상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귀가 멍해진 것처럼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다. “이게 꿈이겠지?” 같은 말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선생님들 중 한 분이 나를 데리고 시험지를 확인하러 화학 교과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점수를 확인하면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을 거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억지 희망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교과실에 도착해 시험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쳤다. ‘괜찮을 거야. 뭔가 오류가 있을 거야. 다시 확인하면 달라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 희망도 시험지가 도착하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화학 선생님은 내 점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더 올릴 점수가 없다.”


내 손에 들린 시험지는 차가웠고, 점수를 확인하던 선생님의 목소리는 무겁게 들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 기분이었다. 화학에서 떨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과목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시험지를 손에 쥐고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이럴 리가 없는데.’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차올랐다.


결국, 나는 선생님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모든 감정이 터져 나왔다. “왜 하필 나인가요?”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준비했던 목표였기에 실패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끝없이 자책했다.


화학 선생님은 “괜찮아. 3학년 때도 충분히 잘할 수 있어.”라고 위로했지만, 그 말은 내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의 슬픔과 좌절 속에 깊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들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고, 나는 마치 시간 밖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눈물을 가까스로 멈추고, 2학년실에 다시 들어갔을 때, 담임선생님들과 학년부장 선생님이 여전히 자리에 앉아 계셨다.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섰고, 침묵이 몇 초간 흘렀다. 갑자기 부장 선생님이 전화를 거셨다. 상대는 아버지였다.


“아버님, 지훈이가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번에 조기 진학은 아쉽게도 안 됐지만, 아이는 여전히 가능성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차분히 말씀하셨지만, 내 귀에는 그 말이 계속 가시처럼 박혔다. “아쉽게도 안 됐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한참 이어졌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부장 선생님이 내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지훈, 아버지랑 이야기 좀 나눠보자.”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을 때, 손이 떨렸다. 나는 천천히 귀에 대었고, 그 순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아, 괜찮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다시 차올라 흐르기 시작했고, 목소리는 떨렸다.

“죄송해요, 아빠. 제가 못했어요.”


그 한 마디를 내뱉으면서도, 나는 목이 메어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내 울음소리를 듣고 계셨다.


아버지의 위로는 따뜻했지만, 그 순간의 죄책감과 실패감은 어떤 말로도 위로되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선생님께서 “사인은 옆 교실에서 하면 된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 교실로 발길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서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을 더욱 잔인하게 만들었다.


옆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준비된 서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내 실패를 문서로 공식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제외한 많은 친구들은 곧 강당에서 올라와서 조기 졸업을 성공했다는 사실을 공식화할 것이었다. 서명을 하며 내 손은 떨렸고,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기 진학의 꿈이 끝나다


서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섰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는 현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조기 진학의 꿈이 끝났다.” 단순히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꿈꾸던 미래를 눈앞에서 잃어버렸다는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강당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한참 동안 복도에 서서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더 했더라면. 내가 조금 더 준비했더라면.” 모든 책임은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그 무게는 너무나도 버거웠다.


강연을 진행하던 강당으로 갔을 때 친구들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함께 울어주는 친구도 있었고, 나를 꼭 안아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 친구들은 그저 침묵하며 눈치를 보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들었던 비아냥 섞인 이야기들이 떠올라 더 서러워졌다.


그날, 나는 내가 실패했음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꿈꿨던 미래는 단 5점 차이로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특별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다


화학에서 단 5점이 부족해 조기 진학의 꿈이 좌절된 이후, 나는 계속해서 실패를 마주해야 했다. 그 충격은 단순히 한 번의 좌절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도미노처럼 내 일상과 모든 성과를 무너뜨렸다.


학기말 성적


학기말 성적이 발표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절망해야 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수학 성적이 6등급으로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1학년 때보다 더 낮아진 점수. 시험지에 적힌 숫자를 보며 손이 떨렸다. 내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결과는 오히려 뒷걸음질이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기 진학을 준비하느라 내신 공부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과신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과학고에서 영재성을 기반으로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는 엄격한 성적 기준과 성취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내 성적표는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제는 영재성으로 지원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이 내게 던진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조기 진학이라는 목표를 잃은 것에 이어, 영재성으로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잃게 된 나는 더 이상 과학고에서의 꿈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 학교에 온 게 맞는 선택이었을까? 내가 과연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과학전람회


조기 진학과 내신 준비로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과학전람회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실험실에 모여 세포를 배양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보고서를 작성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준비 과정 속에서도 전국 대회 진출이라는 희망이 나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결과 발표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전국 대회 진출조차 하지 못했다. 노력에 비해 초라한 성과였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다


이렇게 세 마리의 토끼를 모두 놓쳤다. 조기 진학은 실패했고, 내신은 하락했으며, 과학전람회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때는 내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하루아침에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기숙사에서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나와 함께 준비했던 친구들은 성공적으로 조기 진학 대상자가 되거나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들의 환호와 웃음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잃은 내가, 모든 것을 가진 그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고립감과 슬픔


조기 진학 실패 소식이 퍼지면서, 일부 친구들은 나를 위로했지만, 몇몇 친구들은 내 실패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볼 때마다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나도 잘할 수 있었는데, 왜 못했을까?” 스스로를 끝없이 자책했다.


사실 조기 진학 2차 시험을 치르기 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복도 끝에서 들려온 몇몇 친구들의 대화가 들렸었다.

“누가 조기 진학에서 떨어졌으면 좋겠어?”

“그나마 생명 하는 지훈이지, 뭐.”


그들의 농담 섞인 말은 나를 찌르는 칼처럼 아팠다. 그 대화를 잊고 싶어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화학에서 단 5점이 부족했던 게 운명인가? 그날 밤은 끝없는 의문과 슬픔 속에서 잠들지 못한 채 흘러갔다.


끝없는 추락


결국, 2학년 1학기를 마무리하며 받은 성적표는 더 가혹했다. 1학년 때와 비교해 모든 성적이 하락했고, 성적은 3등급 후반이었다. 1학년 때보다 나아지기는커녕 뒤로 후퇴한 결과였다. 1학기를 마무리하는 순간, 나는 내가 정말로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완전히 잃었다. 내가 세운 목표는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나는 그저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의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단정 지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기분. 그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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