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슬로프
최근 강원도 스키장을 다녀왔다. 눈이 소복이 쌓인 설원과 활강의 스릴은 언제나 마음 한편을 설레게 한다. 학창 시절 부산에서 자란 나는 눈이라는 것 자체가 여전히 신비롭고 따뜻한 동심을 자극한다.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눈을 만질 때의 포근함, 그리고 그 위를 걷거나 미끄러질 때 들리는 ‘뽀드득’ 소리는 왠지 모르게 상반된 매력을 동시에 지닌다.
사실 부산에서 지낼 때는 스키장을 자주 갈 기회가 없었다. 가족 모두가 멀리 이동해야 했기에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전국 각지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부산에서 온 친구들에게 맛있는 회와 지역 투어를 선물한 것처럼, 타 지역 친구들은 스키장을 함께 가자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덕분에 내게 스키는 단순히 겨울 레저가 아니라, 친구들과 만들어가는 소중한 추억이자 인생의 경험치를 쌓는 장이 되었다.
가장 먼저 스키에 입문했던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부산 근처에 있는 에덴벨리 리조트에서 처음으로 스키화를 신고, 두 발에 긴 스키를 붙여 낯선 걸음을 뗐던 기억이 생생하다. 평지에서도 몸을 가누기 어려워 몇 번이나 넘어졌고, 리프트를 타고 초급 슬로프 꼭대기에 섰을 땐 ‘내가 과연 이 경사를 내려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동시에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묘한 설렘도 있었다.
처음에는 ‘A자(피자)’ 자세로 겨우겨우 균형을 맞추며 내려왔다. 지금 보면 굉장히 느린 속도였겠지만, 당시엔 체감상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아찔했다. 다리는 금세 뻐근해졌고,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하느라 녹초가 되었지만, ‘어쨌든 내가 해냈다’라는 작은 성취감에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그 순간이 아마 스키의 세계로 발을 들인 첫걸음이었고,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번에 강원도 스키장을 다시 찾았을 때는 1년 전보다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미 한 번 타본 경험이 있으니 초급 슬로프에서는 비교적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중급 슬로프에 도전해 볼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직 A자 외의 자세가 익숙하진 않았지만, 서서히 11자(패럴렐) 자세를 구현해 보려고 노력하며 속도를 조금씩 높였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다. 초급보다 훨씬 가파른 경사를 내려다보면 ‘혹시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스쳤다. 하지만 스키의 매력은 이미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면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내려가야만 하므로, 더 집중해서 속도를 제어하고 몸의 무게중심을 낮추면서 턴을 시도한다. 그렇게 몇 번의 턴을 반복하다 보면 두려움 대신 조금씩 짜릿함이 올라온다. 설면을 가르며 느끼는 적당한 진동, 그리고 ‘내가 이 경사를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이 주는 쾌감은 생각보다 훨씬 큰 만족감으로 다가온다.
처음 중급 슬로프를 성공적으로 내려왔을 때, “할 수 있구나!”라는 믿음이 확 올라왔다. 그러자 ‘중급’이라는 단어가 주던 무게와 공포가 급속도로 옅어지면서, 속도도 이전보다 더 즐기게 되었다. 내게 허용된 새로운 영역이 생긴 듯한 기분, 그것이 스키를 타면서 느끼는 성장의 짜릿함이자 자기 확장의 기쁨이었다.
슬로프에서 내려오다 보면 중간중간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서툴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잘 탄다고 생각할까? 사실 그 시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스키는 내 몸과 눈(雪), 그리고 중력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완전히 집중해야 하는 스포츠다. 밖에서 보는 시선에 흔들리다가는 넘어지거나 부상을 당하기 쉽다.
회사생활이나 인간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흔히 ‘남들은 내게 어떤 평가를 내릴까?’라는 고민 때문에 스스로를 과도하게 억누르거나, 반대로 필요 이상의 포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내가 현재 이 일을 어떻게 감각하고,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가’, ‘내가 이 관계에서 어떻게 몰입하고, 상대방과 진실된 교류를 하고 있는가’이다.
스키장에서 초급자들을 보며 과거의 나를 떠올리기도 하고, 상급자들을 보며 미래의 내 모습을 꿈꾸기도 한다. 이것은 회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먼저 일에 숙달된 선배들을 보며 조언을 구하고, 이제 막 입사한 후배들에게는 내가 배운 것들을 알려줄 수 있다. 결국 배움과 가르침, 조언과 수용이라는 과정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그 사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굳이 남들과 비교해 일희일비할 필요 없이, 현재의 내가 어떤 상태이며 앞으로 어디로 갈지에 집중하는 태도가 더 건강하다.
스키를 탈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은 온몸을 ‘지금 이 순간’에 던지는 몰입 상태다. 몸과 스키가 설면을 지날 때의 진동, 바람이 볼을 스치는 감각, 경사가 만들어내는 중력의 압박감과 해방감. 이 모든 요소가 나를 완전한 ‘지금’에 살도록 강요한다.
이런 몰입은 회사 업무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될 때가 있다. 그 순간에는 상사의 평가나 동료의 시선보다, 문제를 해결하고 무언가를 창조해 낸다는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느낀다. 인간관계 또한 그렇다. 사람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공감할 때, 자신의 불안이나 고민을 잠시 잊고 상대방에게 온전히 몰입하면 오히려 더 깊고 풍요로운 관계가 만들어진다.
스키 실력은 하루아침에 향상되지 않는다. 날씨, 체력, 멘탈 상태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어떤 날은 더 잘 타고, 또 어떤 날은 자꾸 넘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런 반복 속에서 결국 조금씩 나아진다는 사실이다. 성장과 후퇴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그 곡선이 완만하게 우상향 하는 형태가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프로젝트에선 기대 이상으로 성과를 내지만, 다른 프로젝트에선 실패를 경험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갑자기 서먹해질 수 있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누군가와는 다시 친해질 수 있다. 우리 삶은 고정되지 않고 늘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부침이나 좌절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언젠가 또 다른 성장의 파도가 올 것임을 믿고 꾸준히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결국 ‘나만의 속도를 찾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스키장에서 속도를 너무 빨리 내면 제어가 안 되고 위험해진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속도를 억누르기만 하면 재미도 없고 실력 향상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느 정도 속도가 편안하고, 어떤 방식으로 활강을 즐기는가’를 스스로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회사생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빠른 승진과 연봉 상승에 욕심을 낼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안정적인 리듬과 가족 혹은 여가 시간을 더 중시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누군가는 주말마다 약속을 잡아야 마음이 편하지만, 누군가는 가끔 만나는 느슨한 관계가 더 잘 맞을 수도 있다. 남들과 똑같은 방식을 강요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성향에 맞춘 ‘속도와 방식을 설정’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건강하고 행복한 길이다.
스키장을 함께 찾아주는 친구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혼자 시도할 수도 있지만, 함께라면 두려움도 덜어주고 즐거움은 배가된다.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잘 모르는 기술은 알려주며, 때로는 같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사진을 찍어 추억을 쌓기도 한다.
회사에서도 동료와 선후배가 존재한다. 힘든 업무를 나누고, 서로의 실수를 보완해 주며, 서로가 가진 정보와 노하우를 공유할 때 팀 전체의 역량이 한 단계 올라간다. 초보자에게는 튼튼한 멘토십이 필요하고, 숙련자에게도 끊임없는 피드백과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 이런 ‘함께하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각자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게 된다.
결국 인생은 다양한 난이도의 슬로프가 혼재된 거대한 산과도 같다. 초급, 중급, 상급 슬로프가 있고, 때론 예측하지 못한 울퉁불퉁한 지형을 만날 수도 있다. 날씨가 좋으면 속도가 잘 붙어 통쾌한 활강을 즐길 수 있지만, 설질이 좋지 않거나 체력이 떨어지면 넘어지기 쉬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피하기만 한다면, 언젠가 또 도전하고픈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도전과 휴식, 몰입과 회복의 사이클이 계속 이어진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간직한다. ‘내가 혹시 다른 사람들보다 늦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도 들고, ‘조금 더 속도를 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욕심도 생긴다. 그 모든 감정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건강한 삶의 흐름임을 알게 된다.
스키를 타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정답이 정해진 삶은 없으며, 현재를 온전히 즐기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곧 인생의 본질이라는 사실이다. ‘잘 탄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짜로 스키를 즐기고 있는지, 그 순간의 경치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된다. 속도를 제어하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는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국 내 ‘슬로프’를 어떻게 내려오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반드시 남보다 먼저 내려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가끔은 내가 어떤 경치를 놓치고 있는지 둘러보고, 경사면 위에서 나 자신이 느끼는 바람과 설원의 질감에 온 신경을 기울여보자. 그 순간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어느 순간, 다른 이들과 함께 리프트에 오르며 새로운 슬로프를 향해 갈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때 느끼는 작은 두근거림과 “이번에는 더 즐겨보자”라는 마음가짐이, 곧 우리의 삶을 조금 더 풍요롭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결국, 스키에서 배우는 인생의 교훈이란,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잠시 쉬더라도 다시 출발할 수 있으며, 두려움을 스릴로 바꾸어 나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눈이 사라지고 봄이 오더라도, 우리의 삶이라는 ‘슬로프’는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겨울이 오면,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스키를 챙겨 도전한다. 그 주기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단단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