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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카이스트생의 글쓰기

by 지훈

공대생

이 말은 지금의 나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이자, 오랜 기간 내 앞에 자연스레 붙어온 꼬리표일 것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이공계 과학도라는 길을 걸어왔으니, 책상 위에 남아 있는 건 대개 수식과 숫자, 그리고 실험보고서의 흔적뿐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이렇게까지 글을 풀어내고 있는 건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변화다.


나는 주로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며 성장해 왔다. 수학과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문제마다 확실한 정답이 존재했고,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의 ‘공부’였다. 그래서였을까, 고등학교 시절 “옳은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쓰는 행위, 예를 들면 자유로운 에세이나 문학적 표현을 필요로 하는 과제들은 늘 낯설고 어려웠다. 수행평가를 위해 몇 줄 쓰는 정도가 내게 허락된 글쓰기의 전부였다.


당시 나는 분명한 답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는데, 그것이 오랜 시간 내 공부 방법이자 삶의 태도였다. 옳은 답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영역. 가령 창작, 예술, 글쓰기 같은 부분에서는 발을 디디기 두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내가 가진 ‘정해진 답’에 대한 확신 없이 무작정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영역” 으로 느껴졌고, 따라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그렇게 글쓰기를 외면하고 지내던 내가, 왜 기록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주변 친구들이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기록이라는 행위는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펜을 들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려니 여러 생각이 스쳤다. 과연 내가 남긴 글을 누군가가 ‘좋지 않다’고 비평하면 어떡하지? 글에 대한 평가가 곧 ‘나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 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주저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오랜 시간 내가 자기혐오에 기반을 둔 채찍질로 스스로를 몰아붙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느낀 압박감, “조금 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스며 있어서 내 본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는 더욱 꺼려졌다.


하지만, ‘두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글쓰기뿐 아니라 내 삶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자기혐오와 채찍질이 나를 버티게 하는 방식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성찰과 즐거움”을 안겨주진 못한다. 남들이 볼까 무서워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나는 영원히 나 자신과 마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글쓰기는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자 내 안의 감정을 끄집어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글감이 마구 떠올랐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상 속 순간들이 곱씹어볼수록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고, 그 의미가 글이라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예컨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같은 길을 걸어 학교를 가는 평범한 장면마저 ‘오늘은 어제와 무엇이 달랐지?’라고 관찰하기 시작하니, 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이다. 사소한 질문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 하나의 메시지로 구체화되었다. 글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을 ‘그냥 흘러가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가 담긴 순간들’로 바꿔주는 마법 같았다.


이렇게 쓴 글들을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면, 그때의 기분과 생각이 고스란히 떠오르면서도 또 다른 영감을 준다. 하루 만에 다시 읽어도 “내가 이런 말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기도 하고, 동시에 “그땐 이렇게 느꼈는데 지금은 이렇게 바뀌었네?”라며 내 안의 변화를 확인하기도 한다.

글쓰기는 결국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미래의 어느 날, 지금의 기록을 다시 보게 될 때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느끼고, 웃고, 고민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것이 내게 있어 글쓰기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나 자신의 통찰’을 이끌어내는 매개체가 되는 이유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건, 글을 한 번 쓰기 시작하니 “관성”이라는 힘이 작용해서 계속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렵게 정지 상태를 벗어난 뒤에는 오히려 그 움직임을 멈추기 어려워진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바닥났다고 여겼던 창작의 재료들이 사실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삶은 매일 변화하고, 내 감정도 매번 새로운 모양을 띠며, 그 모든 것은 글로 쓸 수 있는 소중한 원천이 되는 셈이다.


나의 소재

한때는 글 쓰는 소재를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소재는 무아(無我)”,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를 고정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계속 변하는 존재로 인식하면 일상 어디에서나 글감이 발견된다.

아침에 습관처럼 내려 마시는 커피 한 잔에도, 실험실에서 조우하는 새로운 공식과 오류에도, 친구와 밥을 먹는 사소한 풍경에도 놀라울 만큼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 이야기를 붙잡고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라고 곱씹다 보면, 글은 스스로의 논리와 흐름을 찾아가는 것이다.


글쓰기는 그래서 때때로 에세이가 되고, 때로는 짧은 소설이 되기도 하며, 또는 단순한 일기나 ‘감정 기록장’이 되기도 한다.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지금의 나를 솔직히 남긴다는 점에서 큰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미래의 내가 이 글을 다시 볼 때 또 어떤 시선으로 과거의 나를 바라볼지 상상하면, 그 기대만으로도 즐겁다.


作家

사실 ‘작가(作家)’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하게 들려서, 처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내가 감히 작가라는 호칭과 어울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어떤 식으로든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 프로그래머는 0과 1의 언어로 코드를 짓는다.

• 미술가는 물감과 붓으로 캔버스를 채운다.

• 요리사는 식재료로 새로운 맛을 창조한다.

• 건축가는 자재를 모아 구조물을 세운다.

• 부모는 자신의 DNA로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작가’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글을 쓰는 행위는 다른 창작물에 비해 비교적 많은 사람이 깊게 공감하고 직접 체감하기 쉬운 형태다. 문자와 문장, 단어라는 공통된 언어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글 쓰는 사람’을 특별히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해 온 예술이 글쓰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문명이 남긴 문자는 돌벽이나 종이에 새겨져 인류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 흔적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 사람들의 사상, 감정, 생활을 짐작한다. 마치 그 사람들과 시간을 초월해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시공간을 넘어 내가 나 자신과, 그리고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 가장 확실한 통로를 마련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곧 “내가 나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어떻게 풀어낼지 막막해지는 순간, 우리는 두려워서 멈칫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계속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이 단어가 내 마음에 더 와닿네?”, “이 표현이 지금의 감정을 더 잘 드러내주겠는데?” 하면서, 하나씩 단어와 문장을 골라 문서 위에 눌러쓰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문장, 한 문단은 결국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별이 되어 나의 세계에 떠오른다. 그 별은 내 의도와 감정, 그리고 살아온 시간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특별한 작품이 된다. 때로는 미흡하고 거칠어 보이더라도, 나 자신만큼은 그 가치를 알고 있다.


공대생이자 작가

나는 공대생으로서 여전히 실험보고서나 연구결과처럼 ‘정답이 있는 글’을 쓰는 데 익숙하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글쓰기에도 익숙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이렇게 표현했는데, 혹시 다른 방식으로 써보면 어떨까?”라며 시행착오를 겪는다.

무엇보다 내가 써 내려간 글을 다시 읽으면서, “아, 그땐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라며 성찰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결과적으로는, 글쓰기 자체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배우고, 그 배움의 결과를 다시 한번 정리해 표현하는 과정”이 된 것이다. 마치 실험을 반복하는 것처럼, 글을 읽고 고치고 보완하면서, 앞으로 더 나은 문장과 표현을 얻어가는 셈이다.


지금도 수많은 공대생들은 밤늦게까지 문제집의 정답을 맞히고, 프로그래밍 코드를 디버깅하며, 실험 데이터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정답 중심’의 세계에 익숙한 내가 “글쓰기라는 열린 결말의 장”에 들어서게 된 것은 내게 큰 도전이자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더 이상 내 과거를 부정하거나, 무작정 완벽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 작은 생각 하나하나를 존중해 주고, 그 생각이 기록을 통해 “나만의 언어로 완성된 작품”이 된다는 사실을 오롯이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면, 주저 없이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어쩌면 언젠가 내 글들을 읽는 누군가는 이 기록들을 통해 작은 위로나 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또는 나와는 전혀 다른 해석과 감정을 품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이 글쓰기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궁무진한 세계, 그 세계에서 나는 계속해서 나를 표현하고 싶다. 그게 내게 있어, ‘진짜 공대생이자 작가로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공대생이다!”라는 정체성을 굳게 품은 채,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내일의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다른 문장과 단어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일 것이다. 그 끝이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두려움 없이 글을 이어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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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KAIST 직업 학생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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