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과학 그 사이
얼마 전, 바이오및뇌공학과 학과장님과 점심식사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단지 한 끼의 식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제 갓 2학년에 진입한 내가 학과장님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크게 다가왔다. 그간 학생회 부원으로서 잠깐씩의 접점만 있었고, 개인적으로 교수님께 따로 연락을 드린 적은 없었는데, 오히려 학과장님 쪽에서 먼저 초대 메일을 보내 주신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감사함이 느껴진다.
게다가 ‘최근 내가 쓴 글들을 교수님들 몇 분이 읽으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글이 지닌 힘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 개인적인 일상을 기록하는 수준이라 여겼던 것들이 의외의 경로를 통해 학과장님께까지 전해졌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방학 중 겪은 소소한 일들과 군대를 다녀온 뒤 설계한 진로나 미래에 대한 구상을 교수님께 간단히 말씀드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최근 내가 고민하고 있는 ‘행복’과 ‘무아(無我)’ 개념에 대해 설명하게 되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무아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스스로 질문하며 에세이를 써 왔고,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과 관점을 나름 정리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교수님 앞에서 말을 꺼내 보니,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만큼 내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 자체는 학생들과 허물없이 어울리시고, 인자하고 열린 태도를 지니신 분이었지만, ‘오랜 연구 경력을 갖춘 어른과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조심스럽게나마 내 생각을 정리해 전해 드렸고, 그 사이사이에 교수님은 흥미로운 과학적 관점을 덧붙여 주셨다.
“무아란 결국 우리가 배운 것이며, 뇌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이 한마디는 나에게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평소에 무아를 철학적 맥락에서 떠올리곤 했는데, 교수님께서는 이를 시냅스의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으로 연결 지어 설명하셨다.
뇌에는 시냅스라는 뉴런 간 연결 부위가 있고, 이것이 학습과 경험에 따라 강화 혹은 퇴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 결과 뇌의 구조와 회로가 바뀌고, 이는 곧 우리의 생각이 변화하는 근본적 메커니즘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무아나 행복 같은 추상적 개념을 ‘깨닫고’ ‘느끼는’ 과정 역시 궁극적으로 시냅스의 구성과 활동에 달려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행복’이라는 개념 역시 뇌과학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쾌락과 행복을 구분하는 문제도 전기적 신호의 산물로 바라볼 수 있다”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쥐의 뇌에 특정 부위를 전기 자극하여 쾌락을 유도할 수 있다는 실험 예시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쾌락이란 어찌 보면 신경회로의 자극과 그에 따른 도파민 분비 등의 생물학적 프로세스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쾌락과 행복 중 어느 쪽이 더 지속적이거나 본질적인가?” 같은 화두는 단순히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만이 아니라, 그 감정의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define)에 따라 달라진다는 게 교수님의 요지였다. 무언가를 연구하려면 먼저 “우리가 연구하려는 상태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정의 내릴 필요가 있고, 그 정의가 모호하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쾌락은 짧은 순간의 자극과 보상을 명확히 측정하기에 비교적 접근이 쉽지만, 행복은 더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심리 상태를 포함하므로, 정의 내리고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 자체가 까다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과학이나 심리학에서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표가 행복이라는 상태를 나타내는가?”라는 핵심 define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교수님은 대화를 마무리하며, “과학자로서 연구한다는 것은 아무리 개인적·주관적인 영역이라 하더라도, 결국 객관적인 관찰과 측정을 전제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셨다. 나 역시 내 글에서 행복이나 무아를 논할 때, 다분히 내 안에서 느껴지는 주관적 깨달음에 의존해 왔다. 그런 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과학도라면 그 깨달음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도록 더 명확한 개념화와 객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내가 완전히 교수님의 견해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때론 예술적·철학적 성찰에서 비롯된 통찰 역시 소중하고, 그 과정에서 얻는 진실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뇌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내 생각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은, 내가 미처 몰랐던 과학적 사고의 틀을 배우는 기회였다고 느꼈다. 어떻게 보면 “철학적 개념조차도 뇌 신경망의 결과이자 과정이다”라는 관점에서, 나는 나의 생각과 객관적 사실 사이를 좀 더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된 셈이다.
점심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교수님과의 대화는 꽤나 농밀하게 진행되었다. 평소라면 친구들과 “행복은 이런 거 아닐까?”, “무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하고 가볍게 넘겼을 주제를, 좀 더 과학적으로 구조화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과학도를 길러내는 대학’의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각자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크고 작은 질문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정의하고 접근하는 훈련을 할 수 있는 장(場)이 바로 이런 만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돌아보면, 교수님과 마주 앉은 그 점심식사는 내가 쓰는 글의 본질을 돌아보고, ‘나는 무엇을 정의하고자 하는가’에 대해 성찰해 보게 만든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단순히 내 주관적 깨달음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깨달음을 만약 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어떤 측정 기준이 필요할까?”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내 글은, 조금 더 과학적 시선과 개인적 통찰이 어우러진 형태로 변해 갈지도 모르겠다. 또, 그 길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행복이나 무아를 다시 이야기할 때, 시냅스와 가소성, 그리고 “주관을 어떻게 객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이번 점심 대화를 통해 얻게 된 가장 큰 배움이자 기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