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이 안될 때 준비를 한다. 준비란 단지 성공을 위한 사전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구성해 가는 시간이며, 스스로의 실존을 다지는 시간이다. 형편이 될 때 준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형편이 된다는 것은 이미 세계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상태이며, 그 순간은 대응의 시간이지 준비의 시간이 아니다. 준비는 항상 고요하고 고립된 내면에서 시작된다.
형편이라는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바라보는 곳이 너무 가까우면 삶은 가볍고 얕아지며, 너무 멀면 현실은 무거운 짐이 되어 나를 짓누른다. 그 중간, 가까우면서도 먼, 그 애매하고 불분명한 거리감을 응시하는 것. 그것은 어느 곳도 아닌 지금 이 자리,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내리는 결단이다.
처음의 발걸음은 작고 미약하다. 심지어 그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미동 속에 담긴 의지는 결국 나를 어딘가로 이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설계와는 다르더라도, 들인 에너지의 총량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과는 어쩌면 실패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에게 값지다고 여겨진다면, 그 자체로 삶은 의미를 획득한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긍정하는 태도 속에서 생겨난다.
마부작침(磨斧作針)이 떠오른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그 말은, 단순한 수고와 시간이 모여 결국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상징이다. 이때, 조금은 낯설지만 새로운 관점을 제기해 본다. 꼭 결과물이 초기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바늘로 가는 길이 반드시 직선일 필요는 없다. 마부작침이 이르는 곳은 단순히 목표가 아닌 그 과정에서 얻어진 무엇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다양한 형태로 나를 다듬어 가며, 그 형태는 반드시 내가 처음에 구상한 바늘일 필요는 없다. 혹여 그 바늘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늘은 결국 바늘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바늘은 다른 용도로 변형될 수도 있다.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품을 수도 있다. 내가 원했던 바늘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그러나 나의 목표와 나의 길을 꿰뚫을 수 있는 무언가로 변형되는 것이다. 과정에서 마주치는 의도치 않은 전환들, 예상치 못한 도전들 속에서도, 그 방향성을 잃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결국 내 자신을 바늘처럼 정교하게 다듬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 준비의 시간을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 오랜 시간 속에서 예리함은 깊어지고, 결국 고난과 역경이라는 단어 너머, 나의 길을 꿰뚫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