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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Dec 06. 2021

매일 마주한 생각의 순간들

하루, 극복, 외면, 과정

생각의 순간 1 - 하루


미처 태양도 고개를 들기 전의 새벽녘. 어젯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바람 한 줌이 흘러 들어와 코 끝을 간질였다. 숱한 걱정과 근심으로 얼룩진 내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쳤다. 얼마 만이었을까. 이렇게 행복한 감정을 느껴본 것이.  모처럼 찾아온 행복을 오랫동안 내 품에 가둬두고 싶어서 한참을 창밖을 응시하며 누워있었다. 해가 떠오르며 창밖의 풍경이 달라질 무렵에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터덜터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바나나맛 두유가 눈에 띄었다. 평소 같으면 무심하게 빨대를 꽂아 마셨겠지만,  어쩐지 두유를 마시는 작은 행위에도 공을 들이고 싶어졌다. 지난밤, 공들여 닦은 깨끗한 컵에 두유를 붓고,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한 모금씩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입안의 달큰함의 채 가시기도 전에 집안일을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내 의지로 하는 집안일은 언제나 즐겁다.  스피커로 사비나앤드론즈의 음악을 들었다. 꿈에라도 나올 듯 몽환적인 음악을 들으며, 점점 집안일에 취해갔다. 싱크대 위에 켜켜이 쌓여 있던 그릇들을 헹궈내고, 바닥을 널부러진 머리카락을 청소기로 모조리 빨아들였다. 곧 휴지를 토해낼 것만 같은 쓰레기통도 말끔히 비웠다. 한껏 청소에 열을 올리고 나니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일주일 만의 청소로 한껏 혹사된 허리를 달래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서늘한 밤 공기가 땀을 식혀주었다. 방충망 사이로 유난히 반짝이는 별이 눈을 사로잡았다. 삭막한 서울의 밤 하늘을 빛내고 있는 별을 보니 어렸을 적 엄마가 읽어주셨던 책이 떠올랐다. 양 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하늘의 별님에게 소원을 빌었더니, 그 소원이  이뤄졌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갑자기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짐짓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별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다.  


"부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게 하소서"라고. 물론, 터무니없는 소원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하루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집안일에 열중하는 나름의 착한 일을 했으니, 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하며 빌고 또 빌었다.



생각의 순간 2 - 극복


다들 어떤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까. 난 주로 먹는 것으로 해결한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위로 흘려보내면 모든 것을 잊게 된다. 회사에서 열 받은 날에는 집 앞의 BHC에서 갓 만든 뿌링클 치킨과 생맥주 1000cc를 사서 돌아온다. 집에 들어가 대충 손만 씻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테이블 앞에 앉아 본격적인 먹방을 시작한다. 


닭다리 하나를 움켜쥐고 마치 산적처럼 쥐어 뜯은 후, 입 안에 은은하게 맴도는 뿌링클 향을 즐겼다. 흘러 넘치는 뿌링클 가루들로 목이 간질간질 해질 무렵이면 갈색 페트병에 고이 담긴 생맥주를 목구멍으로 흘려 넣는다. 한모금 마시자마자 온몸에 찌릿한 전율이 흐른다.


배가 터질 때까지 치킨과 맥주를 즐기고 나면 마법처럼 머릿속이 맑아지며 미움이 사라진다. 심지어 어떤 날은 자책하기도 한다. '왜 내가 오늘 오전에 회사에서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었을까'라며 스스로를 나무란다. 아주 잠깐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고 나면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후다닥 편한 잠옷 원피스로 갈아입고 누울 자리를 찾아 나선다. 보통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청하지만, 배가 너무 부른 날은 거기까지 기어가기도 힘들어 바닥에서 자기도 한다.


잠들기 전, 꼭 거치는 과정이 있다. 바로 유튜브를 보는 것이다.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을 시작한 뒤로 하루 종일 푹 빠져 있다. 특히 잠들기 전에 보는 영상은 왜 그렇게 재미있을까. 최근에는 일주어터라는 유튜버에 푹 빠져있다. 일주일 동안 한 가지 다이어트를 멈추지 않고 하는데,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동원해 볼 때마다 웃겨 죽겠다. 


특히 인트로 부분에 다양한 장난감 악기를 활용해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하는 것을 볼 때면 거의 자지러진다. 밀려오는 졸음을 간신히 참아가며 그녀의 영상 5개를 모두 보고서야 겨우 잠든다. 푹 자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어제의 스트레스를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참 신기하게도.



생각의 순간 3 - 외면


외면하고 싶은 흑역사가 있다.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아직도 그때의 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년 반을 다니고 퇴사한 회사가 있다. 인수인계 기간을 짧게 주고, 급히 나오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불편한 동료가 있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은 아니었다. 깔끔하게 잊고 다른 회사를 다니며, 또 다른 분야의 일을 익혀나가고 있을 무렵 우연히 다시 재입사 제안을 받게 되었다. 솔깃했다. 내가 떠난 뒤, 회사는 더 큰 규모로 성장했고 연봉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야근도 없고, 연차 사용도 자유로우니 손해 볼 것이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건 내 인생 최대 실수였다. 내가 재입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교묘하게 나를 괴롭혔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게다가 애초에 약속한 업무와는 완전 다른 일을 맡게 되기까지 했다. 난 브랜딩을 하고 기사를 작성하고, 글을 쓰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는 사람이었는데, 실제로 맡게 된 것은 통계 업무였던 것이다. 계산과 수치 분석에 약한 나는 자주 야근을 해야만 했고, 주말에도 성과 압박에 시달렸다.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아서일까. 잇몸이 붓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몸이 좋지 않으니 마음에도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툭하면 우울해 졌고, 회사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난 재입사 4개월 만에 사직서를 던졌다. 나를 영입한 상사는 이유가 무엇이냐 재차 물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죄송하지만, 더이상은 못하겠어요. 좋은 조건으로 불러주셨는데, 제가 적응을 잘 못한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회사를 떠나왔다. 같은 회사에서 무려 두 번을 퇴사하고 나니, 지난날 다시 입사하겠다며 밝게 대답한 나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고향에 내려가 한동안 푹 쉬었다. 정말 머릿속을 텅 비워 버린 채 말이다.



생각의 순간 4 - 과정


왜 다들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과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난다.  결과가 도출되려면 무조건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독립출판물만 해도 그렇다. 책이라는 결과물이 나와 사람들이 읽기 위해서는 기획을 하고, 원고를 작성하고, 교정을 하고, 표지와 내지를 디자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요구된다. 간혹 독립출판물만 딱 보고서는 분량이 적다, 퀄리티가 별로다, 너무 대충 만들었다는 등의 비난을 가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제작자가 겪은 숱한 과정들이다.  독립출판물 한 권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을까. 어떤 책을 만들지 철저하게 기획을 했을 테고, 이를 바탕으로 매일 부지런히 원고 작업을 해나갔을 것이다. 출판사에 투고를 한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 책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표지는 물론, 내지 디자인까지 일일이 손수 했겠지. 이 모든 과정들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쉽게 비난을 가하거나 마음대로 평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더욱 과정이 아닌 결과만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결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부디 과정 자체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또,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정까지 가치가 없었던 일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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