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 씨는 오늘도 도토리를 줍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날이었다. 그날도 경자 씨는 산에 올랐다. 엄마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녀를 '경자 씨'라고 부른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비닐봉지에는 도토리가 가득했다. 비가 그치고 다람쥐가 먹을 도토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날씨가 추워지자 경자 씨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골프공을 주웠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야구공을 잔뜩 주워와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야구공을 씻었다. 뽀득뽀득 야구공을 씻는 그 뒷모습이 마치 비 내리는 그 날의 얼굴 같아서 한참을 물끄러미 보았던 기억이 난다. 때로 뒷모습이야말로 진짜 표정을 보여준다. 그날처럼.
거실에는 도토리와 골프공, 야구공이 널브러져 있고, 썩은 도토리에서 나온 애벌레들이 기어 다닌다. 식탁 위에는 페트병과 유리병들, 온갖 양념과 잡곡들, 효과를 알 수 없는 식용 가루들이 가득하다. 식탁 위에서 언제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냉장고는 생수병조차 넣을 수 없을 만큼 포화상태다. 냉동실은 이미 문을 열지 못한 지 오래다. 키 큰 행거와 어딘가 짝이 맞지 않는 책상과 책장, 대파, 아보카도 씨를 아무렇게나 심은 스티로폼 박스 화분으로 가려진 창가는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낮이 되어도 집은 환해지지 않는다. 경자 씨의 작은 동굴은 그렇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호주에 살고 있는 이모네 집으로 2주간 여행을 떠났다. 가족 단톡방에는 소녀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경자 씨의 사진이 연신 올라온다. 그 시각 엄마의 집에 모인 삼 남매는 목장갑을 끼고 경자 씨의 동굴로 들어갔다. 2톤 트럭에 실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2박 3일에 걸쳐 버렸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방은 내 담당이었다. 방문을 열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온다. 테트리스를 하듯 요리조리 끼워놓은 짐들이 위태롭게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엄마의 침대에 가만히 누워 본다. 엄마가 누워있었을 딱 고만큼의 자리만 비워둔 채, 손 닿을 거리에 끈적끈적한 흔적만 남긴 채 썩어가고 있는 커피컵 여러 개가 보인다. 다 쓴 화장품통, 유통기한이 지난 비타민과 약들, 10년이 지난 신문과 전단지들, 각종 연체를 알리는 독촉우편물과 공과금 용지들, 언제부터 썼는지 세월을 알 수 없는 다이어리들과 수첩들, 이제는 도수가 맞지 않아 쓸 수도 없는 오래된 안경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휴대폰들, 그리고 한때 다단계에 빠져 사들인 화장품과 효과를 알 수 없는 영양제 박스들까지, 그리고 종류별 성경책과 찬송가, 공부한다고 모아둔 빛바랜 기독교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침대 아래쪽으로는 입지 앉는 옷들이 위태롭게 행거 가득 걸려 있다. 쓰러지기 직전의 행거를 고정하기 위해 못을 박고 박스를 묶는 노끈으로 대충 행거를 묶어 놓았다. 붙박이장 안에도 언젠가는 입겠지, 언젠가는 들겠지라는 마음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은 옷들과 가방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스무 살 시절에 내가 들던 추억의 가방도 있었다. 그리고 책꽂이에 고스란히 꽂혀있단 하얀색 종이는 무언가 봤더니 칠순생일 때 선물한 떡케이크 받침이었다. 그곳에는 선명하게 이렇게 적혀있었다. ‘경자 씨 사랑합니다.’
더 한 것은 안방과 연결된 베란다 문을 열면 풍겨오는 시큼한 냄새이다. 무엇이든 저장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을까 한 때 효소 만들기에 빠졌던 엄마는 날마다 산에 가서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초들을 캐오고 그걸로 효소를 담갔다. 그 효소들은 이제 숙성이 되고도 남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가까이 가면 부글부글 보글보글 아주 작은 탄산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숙성이 되고도 남은 효소들이 폭탄처럼 빵~ 터질까 두려운 나머지 악몽을 꾼 적도 있다. 베란다의 효소들이 터지면서 혹시나 집이 날아가면 어쩌나, 이 집에서도 쫓겨나면 어쩌나 우스운 꿈을 꿀 만큼 베란다의 상태는 심각했다. 아파트 점검을 나온 사람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돌려보낸 것이 수년째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또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 같아도 엄마의 손길이 닿아있는 그 동굴 같은 방을 찬찬히 돌아보자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천장까지 쌓아 올린 상자들이 위태로웠다. 어느 날 자다가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것을 저장강박이라고 하는 걸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잘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경자 씨의 경우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저장강박은 물건을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버리지 못하고 저장해 두는 강박장애이다. 대부분의 경우 쌓인 물건이 생활공간을 혼잡하게 만들고 어지럽혀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뉴스나 다큐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이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이 엄마의 방을 이렇게 쓰레기로 채우게 만들었을까? 야구공을 주워온 날, 뭐에 쓰려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대답이 없다. 그저 야구공을 깨끗이 씻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야구공을 모조리 갖다 버렸다. 엄마는 야구공의 존재에 대해 다시 묻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것을 또 주워올 뿐이다.
엄마의 집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베란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불고 환한 햇살이 들어온다. 이제야 집이 빛을 되찾았다. 삼 남매는 엄마가 돌아오기 전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끝나지 않는 옛날이야기를 시작한다. 경자 씨가 또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보냈다. 소녀 같은 엄마의 얼굴을 보며 삼 남매는 생각한다.
어떻게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엄마를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고된 일이 된 것일까.
쓰레기로 가득 찬 엄마의 방을 청소한 후, 신기하게도 마음이 부쩍 가벼워졌다. 어쩌면 엄마의 방이 아니라 그곳은 우리의 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묵혀둔 우리 삶의 찌꺼기들을 그렇게 엄마에게 버려둔 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우리가 버린 상처들을 모두 껴안고 하나도 버리지 못한 채 차곡차곡 엄마의 방에 쌓아두었다. 엄마의 쓰레기들을 버리면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상처들과 마주해야 했다.
거실에 새로 산 소파를 놓고, 거실장을 새로 들이고 새 TV를 샀다. 이제 우리는 거실에서 TV도 볼 수 있고 커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이런 보통의 일들을 하고 싶었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난다.
달라진 엄마의 방처럼, 경자 씨도 달라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