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은 ‘두 번째 스무 살’
TV 속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남은 기간을 박박 긁어모아 겨우 두 달하고 보름이 지나면 나는 두 번째 스무 살이 된다.
스무 살. 단어 자체만으로 느껴지는 풋풋함. 마법처럼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만 같은 설렘.
일 분 일 초 사이에 청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신비함.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그 환상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어른들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홀로서기는 두 번째 스무 살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되돌아가더라도 여전히 고달플 게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기적은 내겐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일어날 것 같지만 어릴 적 ‘경찰청 사람들’을 보고 무작정 경찰이 될 거야! 하고 다짐했던 그때처럼 너무 현실적인 어른 말고 가끔 무모한 어른이 되어야만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집 자산이 얼마, 부채가 얼마, 이번 달 카드값이 얼마, 이런 이성적인 현생 말고 가끔은 감성적인 갓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서적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다.
한 모금 마시면 머리가 띵한 더블샷의 아아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내게 일말의 희망을 선사해 준다면 머리가 띵한 차가움이 아닌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나도 느껴보지 않을까.
한참 살아보고 난 후에야 두 번째 스무 살이 다가오고야 알게 된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면 분명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날 수 있다. 어른이 되어 깨닫는 것들이라 해서 인생의 진리나 세상의 이치 같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알게 된 생당근의 달달함 이라던가, 지하철은 카드 하나로 두 명이 탑승할 수 없다는 것이라던가, 부산 시티 버스의 색색별 코스라던가. 들여다보면 몰라도 되는 것들이 수두룩하고 실생활에 언젠가는 한 번 써먹을 수 있는 작지만 유용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초록 창에서 검색만으로 알 수 있는 어찌 보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하찮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이 조금은 더 생긴다.
연륜이란 말을 맹신하던 난 나보다 조금 어른들을 인생 선배라 부르며 내가 여태껏 보지도 못했던 그 사람들의 인생을 마치 인생의 답안지라도 찾은 것처럼 모방한 적이 있다.
우습지만 내가 그들이 된 것처럼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내려 커피 한 모금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집에 묵혀두었던 마샬 전원도 켰다. 빈속에 쓰디쓴 커피가 식도를 타고 위장에 안착할 때면 어찌나 속 쓰림이 심하던지 그날부터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세상 다 아는 얼죽아인 내가 따뜻한 커피를 숭늉 마시듯 후루룩대고 있으니 하루의 시작부터 꼬여도 한참 꼬였던 그때를 회상하면 미련했다. 바보 같았다. 하는 생각보다 삶을 사는 게 간절했구나. 싶어 분신술을 써서라도 또 다른 나를 만나는 날엔 한없이 누구보다 따뜻하게 날 안아주리라 다짐했다.
인생엔 답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게 내 삶의 답안지인 셈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행복하든 불행하든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고 고스란히 내가 감내하는 삶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난 총량의 법칙을 믿는다.
어릴 적 떼를 지어 들이닥친 내 영혼을 휩쓸고 갔던 쓰나미를 닮은 불행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분명 내게 남은 것들은 불행보다는 행복이 더 많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살아보자고 글을 쓰고 있는 것 또한 기적 같은 일이며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더더욱 기적이므로 내일의 기적 또한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물 흐르듯이 비 내리듯이 햇살을 맞이하듯이 사 계절을 살아가듯이 만남과 이별 속에서 살고 있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두 번째 스무 살을 살아가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