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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Jul 17. 2023

32살, 70대 언니들이 생겼다

주민자치센터 캘리그래피강좌 이야기

올해부터 만 나이가 적용되어 나는 32살이 되었다. 어쩐지 어려진 기분이 들어 내심 좋았다. 영원히 30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라 괜스레 젊어진 기분이랄까?


나는 나이를 먹는 것을 겁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20대였기 때문일까.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앞자리가 3으로 바뀌면서 나이 먹는 게 조금씩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줄곧 막내를 담당해 오던 내가 막내자리를 양보해야 할 일이 잦아졌달까. 그럴 때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할 것만 같아 내 어깨가 무거워졌다. 사실 나는 아직 '아기'인데...




서른이 되면 감회가 새로워진다고들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경우 29살 12월 아이를 낳았다. 20대의 마지막을 아주 화려하고 다이내믹하게 만든 덕분에 30대가 되었다고 해서 특별한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아이 엄마가 되었다는 기쁨에 잠식되어 있었을 뿐.


아이를 낳으면서 회사를 그만두었고, 육아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만 보냈다. 게다가 아이를 낳자마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약 2년 동안 집에서만 지냈다. 덕분에 아이도 어린이집에 28개월 즈음에나 갈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에게도 여유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개인 시간이 생기고 나니, 나는 무기력증에 빠져 많은 시간을 누워서 보내기 일쑤였다. 이제와 재취업을 하자니 경력단절로 어려웠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니 나이가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하고 무기력한 시간들만 보냈던 것이었다. 30대의 아기 딸린 기혼 여성이 무얼 할 수 있을까 늘 물음표를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 무기력증은 더 깊어져만 갔다.



한 달, 두 달, 세 달...

무기력증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나이만 먹는 내가 덜컥 겁이 났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캘리그래피를 등록했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캘리그래피 강좌에 신청했다. 뭐라도 하자는 마음이었다.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사람들 속에서 무어라도 하면 무기력증이 좋아질 거라 생각했다.



캘리그래피 첫 수업날.

나는 아주 긴장했다. 어떤 분들이 계실까. 접수 인원이 너무 적어 폐강되지는 않으려나.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별별 걱정을 다 해가며 강의실에 도착했다. 복도부터 조금 소란스러운 분위기. 강의실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리고 나는 구석자리에 앉았다.


한눈에 봐도 다들 나보다는 한참 어른들이 앉아계셨다. 내가 강의실을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연령대가 높았다. 혹시 시니어 강좌에 잘못 등록한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결론적으론 아니었다.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돌아가며 한 사람씩 이름과 나이, 간단한 소개를 하는 식이었다.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면 다들 박수 쳐주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내 차례가 되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너무 궁금하니 당장 소개를 해보라고 보채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 소개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이를 말하자 다들 연신 놀라셨다. 너무 젊다는 거였다. 어떤 분은 20대인 줄 아셨다며 다른 의미로 놀라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만 3세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말에는 나이를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리액션을 보이셨다. 나는 수업에서 누구보다 큰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나이가 너무 많아 걱정이었는데, 여기서 나는 어린아이였다. 그들 눈에 나는 얼마나 어리고 가능성이 많아 보이셨을까. 정말로 그게 내게 온전히 느껴졌다. 그래서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아니 좋았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짜릿했다.




"에이, 그냥 언니라고 불러요~"



맞은편에 앉은 어르신과 스몰토크를 나누던 중 호칭에 애를 먹자 쿨하게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50대인 젊은 할머니셨는데, 이 수업에는 70대 분들도 많아 50대면 제법 젊은 편이었다. 50대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애 낳고 키우며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70대고 30대고 다 똑같다고 하셨다. 여기서 만큼은 그냥 언니로 하자고 하셨다. 나는 솔직히 너무 좋았다. 갑자기 든든한 언니들이 생긴 기분에 신났다.


언니들은 정말 최고였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 주시고, 수업 시간 중에 모르는 건 잘 알려주시고, 서로의 글씨를 보며 아낌없이 칭찬해 주시고, 서로를 챙겨주며 지냈다. 수업을 가는 날이면 나 역시도 있는 넉살 없는 넉살 잔뜩 모아서 갔다. 그리고 언니들에게 한바탕 넉살을 떨며 즐기고 왔다. 덕분에 캘리그래피 가는 날만 기다렸다.



나는 매주 화요일마다 캘리그래피 수업을 간다.

40대, 50대, 60대, 70대 언니들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수업을 듣는다. 나는 이 시간이 어찌나 기다려지는지 일주일 중에서 화요일만 목 빠지게 기다린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무기력증도 많이 사라졌다. 또 나이라는 숫자에 연연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나는 그저 나일뿐임을 잊지 말아야지.


내일은 그토록 기다리던 화요일이다.

내일은 또 언니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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