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현 Mar 15. 2022

<소년 시절의 너>를 보고

영화 속 문법 - 가정법에 관한 작은 생각들


0.

 나는 가정법의 시제가 왜 과거형을 기본으로 하는지 늘 궁금했었다. 한국어로는 아무리 설명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부자라면’과, ‘만약 내가 부자였다면’라는 문장엔 의미론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원어민식 사고방식을 익혀라, 시험을 앞두고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게 그들의 사고방식이니까,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받아들이거나 그게 안 된다면 외워라. '가정법=과거시제, 가정법 과거 = have p.p' 나는 영 입에 달라붙지 않는 가정법 문장들을 통째로 외웠고, 작문 시험은 지나치게 싱겁게 끝났다. 나의 경우는 그랬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었고 우리는 비슷하고 다른 숫자가 새겨진 성적표를 받았다.


1.

<소년시절의 너>는 오프닝과 엔딩이 특히 좋았다. 어떤 점이 구체적으로 좋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수미상관이라서일까, 아니면 분명 주제의식을 담은 것 같은, 그러나 무의미해보이는 문장을 반복적으로 말한다는 점이라서였을까. '여긴 우리의 놀이터였어'. 그래, 삶은 곧잘 놀이터에 비유되곤 한다. 한바탕 뛰어노는, 그런 무대. 그런 곳은 지나가버렸다고 해도 과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곳을 과거로 부르는 데에는, 무릇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was와 used to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우리는 그 시간들을 그땐 그랬었지, 하며 관조할 수 있을까. 혹은 관조해도 되는가.


2.

이 영화의 중심적인 메시지를 담았다고도 볼 수 있는 샤오 웨이의 대사, “인생엔 가정법이 없다” 는 어떨까. "우리 사이에 가정법은 싫어",라고 그는 덧붙였다. 19살, 혹은 그 보다 연상. 그의 나이였다. 이 문장은 꽤나 로맨틱하지만, 로맨스를 걷어내고 자뭇 진지하게 굴어보자면 문법이 조금 이상하다. 가정법이란 건 없지만, 우리 사이에 가정법은 싫다니.


이 이상한 용법은 어떤 믿음에 근거하는가. 샤오 웨이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세계에서 ‘인생(삶)’ 과 ‘우리’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가혹한 터전이나, ‘우리’는 가정의 영향권에 있는, 그러나 기왕이면 가정을 극복할 수 있는 세계 내 존재들이다. 인생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있으나 기왕이면 돌이키지 않는 관계면 좋겠다고, 그는 말한다. ‘불능’과 ‘가능의 거부’. 둘은 동어처럼 보이나 둘 사이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간계가 있다. 우리는 그걸 ‘의지’, ‘저항’, 그리고 이따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듯하다.


3.

샤오 베이가 ‘나는 가정법이 싫어’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가정법은 싫어’라고 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그의 세계관(혹은 영화가 희구하는 세계관)에서 ‘나’는 무력하다. 주체는 ‘인생’으로 쉽게 환원되는 파편일 뿐이며, 영화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샤오 웨이나 첸니엔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손쉽게 보여준다. 그들이 겪는 잔혹한 일상은, 독립은 고립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말한다. 샤오베이는 말한다. ‘기선제압을 안 하면 네가 당하는거야’ 어른이 된다는 것이 독립, 그러니까 고립일 뿐이라면 우리는 왜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첸니엔의 담임은 이렇게 말한다. “넌 옳은 일을 했지만, 그로 인해 네 인생엔 그림자가 생길거다. 하지만 하늘 위를 보면 늘 빛이 있어.” 담임은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난다. 영화 속 어른에 의해 인생은 그림자와 빛, 그렇게 이분화된다.


마찬가지로 샤오 베이와 첸니엔의 관계는 그림자와 빛이라는 고전적인 느와르적 클리셰를 차용하다. 그들이 함께 죄를 짓기 전까지는. 영화의 작은 반전이었던 그 장면에서, 샤오 베이는 자신을 희생하며 빛을 지키려 한다. 빛은, 첸니엔은 그림자의 희생을 약간의 머뭇거림과 함께 수용한다. 관객은 이 지극히 고전적인 연출에서 만족감을 얻지만, 영화는 그 지점을 과감히 넘어서고, 자백을 설득하러 온 경찰에게 죄책감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쏟아내는 첸니엔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처연하고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거기에는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무너져, 아니 한데 뒤엉켜져 있었다. 빛은 더 이상 하늘 위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그림자 속에, 그림자 아래에, 아니 구분되지 않은 채 어디에나 있었다.


4.

웨이 라이를 죽였음을 고백하며, 첸니엔은 샤오 베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졌어.”


자신을 괴롭히던 이를 죽이는 것은 지는 일이다. 그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깨달은 자들의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분명 첸니엔은 졌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던 이를 반성하게 할 수도 없으며, 책임지게 할 수도 없는 입장에 처했다. 그녀의 인생에 남을 것은 살인에 대한 책임과, 죽이지 말 것 이라는 후회 뿐일 것이다. 그런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졌다.


이기고 지는 세계, 삶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도 승패로 갈리는 세계는 얼마나 너절한가? 영화 속 중국의 입시전쟁은, 그 표어들은 텍스트로 다시 재현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하고, 당위적이며, 폭력적이다. 첸니엔은 후 샤오디에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했다. 그 폭력적이고 무미한 세계를 유지하는 것은 제도나 악행이 아닌 방관이다. 첸니엔은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인생의 일부로서 존재했고 방관을 삶의 방식으로 삼았었다. 후 샤오디에의 죽음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이전의 방식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게끔, 곧 세계로부터 일정정도의 거리감을 갖게 만든다. 그녀는 이제 이전의 인생에서 볼 수 없었던 곳을, 것들을 보게 된다. 요컨대 샤오 베이라던가. (만약 샤오디에의 죽음이 없었다면, 그녀에게 샤오 베이가 ‘보였을까?’)


그런 시점에서 웨이 라이를 죽이게 된 것은, 첸니엔의 의식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분명 퇴행이다. 첸니엔은 대입때까지만 참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 승패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계에 지긋지긋한 환멸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샤오 베이를 만남으로서 그렇지 않은 세계의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그녀가 잠깐의 분노로 웨이 라이를 죽이게 되다니. 그 사건은 마치 ‘첸니엔’이라는 개별자에게 이 거대한 세계를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너는 승자가 되었지만 그로써 이 굴레에 돌아왔구나, 라고.


5.

가정법이 과거시제를 주된 용법으로 차용하는 데에는 분명 영어학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쯤되면 단순히 이런 생각이 든다. 가정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가정은 후회나 결핍의 부름으로 도래한다. 수많은 후회들, 결핍들은 우리로 하여금 만약을 소원하게 하고 그 내용은 아무리 현재에 도래하지 않았다고 한들 결코 미래는 아니다. 미래는, (역설적이지만) 확정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확정적이지 않은 미래를 우리는 공상이나 상상이라고 부른다. 현재도, 미래도 아닌 가정은 결국 과거로 귀속된다. this was our playground 라는 명제는 가정이다. 그것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기 때문이다. 첸니엔도, 샤오 베이도 그들의 삶은 힘센 과거에 의해 계속에서 소환되고, 붙들린다. 샤오 베이가 인생에 가정법은 없다, 고 단언하는 것은 그저 무력한 의지의 표명, 연약한 절규에 불과하다. …우리 사이에 가정법은 싫어, 그는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라면,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지금 이 현실에, 그리고 어떤 확정이 있는 미래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6.

첸니엔이 “졌다”고 말한 날, 샤오 베이는 첸니엔과 함께 삭발을 하고 웨이 라이를 묻으러 간다. 그 과정에서 대사는 없지만, 관객은 그들의 행동이 ‘지지 않겠다는’ 어떤 표명임을 직감한다. 웨이 라이의 사체를 유기하는 것은 분명 범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밀을 만든다. “너는 세상을 지켜, 나는 너를 지킬게” 라는 샤오 베이이 대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킨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도처에 폭력이, 억압이 깔린 이 세계에서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샤오 베이는 첸니엔을 ‘지키기’ 위해 웨이 라이를 암매장하고, 자백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지켜진’ 첸니엔은 세상을 지킬 수 있을까? 첸니엔은 고뇌한다. 고뇌하는 첸니엔을 보며 우리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제발 자백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다고 샤오 베이를 혼자 둘순 없잖아 라는 감정들. 

 샤오 베이의 앞선 대사는 이전과 동일한 의식구조를 보여준다. ‘세상’은 ‘우리(나)’와 분리된 무엇이라는 의식. 내가 파괴되더라도, 세상은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 그건 첸니엔과 샤오베이를 처음 묶어줬던 로맨티시즘의 핵심이기도 했다. We against the world, 그러나 샤오 베이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순간, 첸니엔은 깨닫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그러니까 ‘너’가 스러지면 내가 지킬 ‘세상’이라는 것 또한 신기루처럼 무너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 추악하고 폭력적인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그 위험한 세계가 우리의 일부였음을. 첸니엔은 자백한다. 그녀 자신의 피폐한 일부, 세계의 중심을 응시하고 그곳을 제 발로 들어간다. 그들이 함께 수감되는 결말에서, 공고해보이던 승패의 세계는 무너진다.


7. 

 <소년시절의 너> 는 어른이 아닌 소년들을 통해 어른의 세계를 비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동화적이다. 어른의 시점에서 보면 그들은 단순한 '소년범'일지도 모른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년시절의 너>는 빛과 그림자, 이분법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항상 존재하고 있는 어떤 '시절'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도심 속 너구리 목격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