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과 도시 하나, 나 하나

전구 하나 갈아 끼운 날의 기록

by 느린 반보

나는 괜찮지 않았다.


살다 보면, 몸이 먼저 알려주는 때가 있다.
“이제 좀 그만하자.”

그런데 그 신호를 제일 늦게 인정하는 사람도, 이상하게 늘 나 자신이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래도 이 정도는 버텨야지”라는 말로 나를 밀어붙였다.

다들 이만큼은 하는 것 같았고,
여기서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고,
힘들다고 말하면 내가 약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했다.

“조금 예민하고, 조금 피곤한 사람.”

근데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건 ‘조금’이 아니었다.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 불도 켜지 못한 채 의자에 기대어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들 힘도, 씻을 힘도,
아무것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밤,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지금 괜찮지 않구나.”

번아웃이라는 말을 책에서만 보다가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 글은, 그 이후의 시간들 중
하루를 통째로 꺼내어 적어 보는 기록이다.

어떻게 무너졌는지,
어떻게 겨우 버텼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주 조금씩
도시와 사람들 사이로 다시 걸어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 시간들을 지나, 어느 날 나는
오랜만에 도심을 천천히 걷게 되었다.
그날의 하루를, 이렇게 남겨 둔다.

번아웃과 도시 하나, 나 하나

어느 날부터인가 방을 치울 수 없는 날이 왔다.
일상생활과 창작 사이의 경계를 잃어버렸을 때였다.

회사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원래라면 일상을 충전하고 쉬어야 했는데,
그 경계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머릿속에는 글이 넘쳤는데
막상 글로 옮겨지는 건 늘 부족했다.
생각처럼 글이 전부 나오지 않으니
몇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 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회사에서 잘되지 않는 나를
보듬고 풀어줄 시간도 없이
집에 와서는 다시 글쓰기에 매달렸다.

수면은 줄었고,
하루하루를 조금씩 앗아갔지만
그때는 몰랐다.

방 안에는 이것저것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치울 수 없는 지점까지 왔는데도
그 생활을 한동안 그대로 이어갔다.

밖으로 나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몇 번,
이어서 두 달, 세 달…
나가는 횟수가 줄더니 어느 순간
아예 나가지 않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무너진 걸 보여줄 수 없으니까
웃는 척을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웃어지지 않았고
작은 업무에도 예민해져 갔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번아웃은 아닐까?”

말로만 들을 땐, 늘 나와는 상관없는 일 같았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찾아보는데,
하… 내 이야기 아닌가.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원인을 알았으니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는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상포진이 찾아왔다.

일단,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방법을 아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 컸다.

퇴근하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하나라도 ‘덜 쌓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더 치운다기보다는
그날 먹은 것만이라도 치우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이게 더 쌓이지 않게 하는 거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치료의 시작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잠깐이라도 밖에 나가
동네 한 바퀴, 사람 없는 곳을 돌아보게 됐다.
왜인지, 사람 없는 곳이 편했다.

망가진 내 모습을
이 상황에서도 보여주기 싫었던 걸지도.

아이러니하게도
대상포진 때문에 억지로 밖에 나가야 했던 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휴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내를 걷고,
카페에 들러 책도 볼 만큼은 호전이 되었다.

시간은 짧았지만,
되돌아오는 휴일과 일상에서
하나씩 안 쌓이게 치우고,
다시 휴일에 도심으로 나가 한 바퀴 돌고,
카페에 앉아 있는 시간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아직 완전히 탈출한 건 아니지만
이런 일상들이 반복되다 보면
언젠가는 예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래서 이 번아웃을 글로 쓰면서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까지 잠식당하지 않고,
그전에 눈치챌 수 있었으면 해서 남겨둔다.

일상이 하나씩 흐트러지는 지점,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줄어드는 지점,
일상에서 예민한 하루가 계속 이어지는 지점들을
조금은 더 일찍 보길 바란다.

“나는 괜찮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
라고 스스로를 몰아넣지 않기.

인정하기 힘들다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알려주기.

정 힘들면,
그때 먹은 것만이라도 치우고,
동네 사람 없는 곳을 한 바퀴라도 돌기.

누워 있고, 방전돼서 아무것도 못하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
살려고 누워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를.

그게 조금 회복되는 지점이라고,
조금 더 깊이 침몰하기 전에
한 번 알려두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은, 쉬는 날이다.

도심을 걷고,
사람들 흐름도 느끼고,
맛있는 돈가스도 먹고,
카페에서 책 보며 쉬는 시간도 늘어났다.

카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들이 들어오는 시간과 겹쳤다.

원래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나가곤 했는데,
여러 번 음료와 디저트를 먹으며 있다 보니
눈앞을 지나가는 얼굴들이 바뀌었다.

연인들, 친구들,
학교를 마친 학생들,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들…

대학생들의 웃음소리,
고등학생들의 공부하는 소리,
서로 알려주며 재잘거리는 목소리.

남학생들은 또 사뭇 달랐다.
각자 앉아서 한두 마디씩만 오가고
자기 할 일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 모습을 보다가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이어 써보기로 한다.

내일 출근을 위해
자리를 일어나 도심 산책을 이어가며
저녁을 위해 자주 가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2만 원대의, 나름 저렴한 곳.
고생한 나를 위한 이 정도 소확행쯤이야.

번화가를 지나며
젊은 사람들, 직장인들이
하루를 내려놓고 있는 모습을 스쳤다.

가게들을 둘러보니 사람들로 가득했다.
행복한 얼굴들, 달아오른 취기,
길거리에까지 흘러나오는 웃음들.
각자의 삶을 연주하는 모습 같았다.

레스토랑에는 막바지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먹다 보니 문 닫기 40~50분 전.
거의 나 혼자인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상하게
어디를 가든 젊은 사람들만 있었다.
아침 돈가스집도, 카페도, 레스토랑도.

사장님들이 볼 일이 있는 날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젊은 직원들은 하나같이 너무 친절했다.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오늘 하루 내게 크게 다가왔다.

“식사는 괜찮으셨어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아침 돈가스집에서도,
카페의 아르바이트생도,
저녁 레스토랑 직원들도
비슷한 말을 건넸다.

별것 아닌 말인데도
오늘은 이상하게 크게 남았다.

레스토랑을 나와
소화도 시킬 겸 번화가 다른 한쪽으로 걸어봤다.

영화의 거리쯤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한 곳에 멈춰 서 있었다.

“무슨 싸움이라도 났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큰 카메라가 보였다.
영화나 드라마 찍을 때 쓰는, 그 카메라.

궁금해서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초점을 맞추는데
프레임 안으로 젊은 얼굴이 하나 들어왔다.

웃음기 넘치는 얼굴로, 알바생이 말했다.

“찍으시면 안 되세요~”

그러고 보니
내 사진 속에 이미 알바생과
큰 카메라가 같이 찍혀 있었다.

황급히 카메라를 내리고
“아, 네네”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궁금해서 다시 다가가 물었다.

“여기 뭐 찍는 거예요?”

알바생은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드라마 찍고 있어요.”

“제목이 뭐예요?”라고 묻자,
“저도 잘 몰라요, 오늘 처음 나와서요.”
라며 다시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이 참 좋았다.

“그럼 누구 나오는 드라마예요?”라고 묻자,

“저 오늘 처음이라 누구 나오는지 몰라요”
하고 밝게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뒤로 뗐고
알바생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깐 생각해 보니,
아까 카페 창가에서 번쩍이던 플래시가
바로 이 촬영 때문이었다 싶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내 취향 덕에
이 장면도 볼 수 있었겠지.

옥수수나 밤을 파는 노점상 아주머니 옆에,
엄마 손을 잡고 선 꼬마 아가씨가 하나 보였다.

하얀 빵모자,
다리까지 내려오는 긴 하늘색 점퍼,
하얀 유치원 가방,
작은 부츠까지 신고 있는,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웃음이 절로 났다.
문득,
“저 아이가 연기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중에 드라마로 방영될 때
이날 이 장면을 다시 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글로 남겨 둔다.
기억을 여기, 한 번 더 새겨 둔다.

다시 알바생 생각이 나서
친구에게 레스토랑 소확행을 알리듯이
“영화의 거리에서 드라마 찍더라”
하고 연락을 보냈다.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거기 찍힌 그 사람 누구야?
어떤 연예인이야?”

큰 카메라와 알바생만 찍혀 있던 사진이라
그렇게 본 모양이다.

나는 그냥,
“그냥 알바생 스태프야 ”
라고 보냈다. 살짝 웃음이 났다.

친구는,
알고 싶었던 건 아마도
어떤 연예인이었는지였겠지.

그래서인지 답장은 없었다.

뒤돌아 걸으면서
알바생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찍으시면 안 되세요~”

나는 이미 한 번 찍었고,
친구에게까지 공유를 했다.

미안해, 알바생.

그래도 내 글에서
너는 오늘 하루의 주인공이 되었고,
한 장면의 영화이자 드라마가 되었다.

언젠가 이 글이 나가서
나는 작가가 되고,
너는 그날을 추억하며
영화나 드라마계에서
또 다른 장면을 찍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찍으시면 안 되세요”라며
웃던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어느 겨울, 12월 초,
영화의 거리에서
우리가 스쳐 지나갔던 그날을
이렇게 적어 두고 싶었다.

이 글이 나의 다음 장면을 위한
대본이 되기를 바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연세 있는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를 마감하시는지
복장과 가방에 고단함이 묻어 있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더라도
고단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으리라.

문득, 나도 돌아가 쉴 곳이 있고,
나는 저분에 비하면 아직 한참 덜 살아봤는데
나도 내 인생의 드라마를 찍고 있구나,
그분도 그 눈가로
자기 하루의 장면을 지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의 돈가스집,
카페 창가,
드라마 촬영장,
번화가,
집으로 향하는 길까지.

언젠가 뒤돌아보면
오늘의 이 순간들이
각자 인생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고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나도,
예전에 돈 없던 시절
친구와 지하철 종점에서 종점까지 타고,
비가 오면 번화가나 대학가를
그냥 걷기만 하던 때를
이제야 영화처럼 떠올리며,
지금 저 아이들이 겹쳐 오는 걸 본다.

집에 들어와
옷도 벗지 않은 채
몇 시간을 이렇게 써 내려간다.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고
방에 쓰레기도 쌓여 있지만
나는 안다.

예전엔 그날 먹은 것만 치우는 게 고작이었는데,
오늘은 꺼진 전구 하나까지 갈았다.

여전히 방은 엉망이지만,
그래도 ‘덜 쌓이게’ 만드는 일들을
나는 계속하고 있다.

이런 자그마한 변화들이 모여
언젠가 나를
예전의 일상으로 돌려놓을 거라는 걸.

치료 단계를
글로 한 줄씩 적어가며,
문득 고개를 들면
아, 또 하루가 다 가 있겠지.

그래도 이상하게,
오늘 같은 날은 나쁘지 않았다.

꺼진 전구도 나처럼 방치해 두었었는데,
그거 하나 갈았다고
괜히 큰 발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렇게 끝까지 적어낼 힘이
오늘의 나에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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