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똥개도 지 집에선 점수 따고

by 들레

1992년 정도쯤으로 기억한다. 결혼 6년 차에 아주 오래되고 허름한 13평짜리 주공아파트에 분가하여 살았다. 이때가 처음으로 내 월급 남편 월급으로 내 가정과 내 살림을 계획할 수 있어 부푼 가슴으로 설레는 시기였다. 아침 일찍 오신 친정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서 집으로 가고, 나는 남편이 출근할 때, 나를 데려다주는 시외버스정류장에서 50여 분 버스를 타고 근무지로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출장을 많이 다니는 직업인데, 그때마다 사무실 봉고차를 이용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운전면허증과 자동차가 꼭 필요할 때였다.

나는 10여 명 동료 직원들과 운전면허취득 교습소에 등록하였다. 사무실과 운전 교습소는 시내에서 뚝 떨어진 곳에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후 시간에 상사의 눈을 피해 남자 직원이 모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학원에 가야만 했다. 보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상사의 불호령에 교습을 받던 10여 명의 직원은 회사로 되돌아왔어야 했었다. 이날을 우리는 ‘포승줄에 묶여서 돌아온 날’이라고 칭하였다. 그 후로는 2~3명씩 시간대를 나누어서 운전 교습소에 다니게 되었다.


퇴근 후 저녁을 해서 먹고 아이들 씻기고 재우고 난 뒤늦은 밤에 자동차 운전 이론 책을 펼치면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했다. 게다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한 번도 제대로 책을 읽어 보지 못하고 응시원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 시험장은 집에서 1시간 30분을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탔지만, 응시 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하게 되어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아쉬움과 원망만 가득 안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면허시험은 정해진 시기가 있었다. 시·군은 몇 달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았고, 대구는 매일 응시할 수 있었다. 대구로 응시한 동료들은 7전 8기를 운운하며 또 떨어졌다고 아쉬운 이야기를 해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대구 시험장은 초행길로 두려움이 앞서 감히 원서를 제출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고향에서 시험 날짜가 잡혀 기쁜 마음으로 1종 보통 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응시 전날, 다시 교본 책을 펴 들고 새벽 4시까지 읽어 보았지만, 끝까지 보지 못하고 아침 일찍 시험장으로 나갔다. 보다가 만 교재의 ‘자동차 구조’ 편을 펼쳐보았는데 시험에서 바로 그 페이지의 문제가 무더기로 출제되었다. 이론 시험은 85점으로 무사히 통과하였다. 신이 난 나는 피곤도 잊은 채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실기시험은 처음 와 본 교습소에서 보았다. 내게는 새 트럭을 주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부담감이 생겼다. 하지만, 침착하자고 되새기며 나는 내 앞의 번호를 달고 있는 응시자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S 코스에서 끝 선에 도달하지 않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신중하게 운전하였다. “삐~” 하고 끝 선에 도달했다는 음이 들려왔다. 물론 주변에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는 응원 목소리의 힘이 컸다.

그다음 장거리 코스에서 나는 기어 변속을 하다가 시동을 세 번이나 꺼지게 했다. 아이쿠나! 이거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시간 안에는 들어가자.”하고서는, 엑셀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그래서 “쌩~”하고 통과하니, “합격입니다”하는 멘트가 나온다.


시험 준비용 책도 끝까지 못 보고, 겨우 2시간 잠을 자고 치른 시험이다. 운전 교습을 받은 지 한 달여 만에 낯선 곳에서 ‘합격’이란 말을 들으니, 나는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뛸 듯이 기뻤다. 내가 그날 처음으로 합격한 사람이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박수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바로 직장으로 전화해서 “나 합격이다”하고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다른 팀장이 “똥개도 지(‘제’의 경상도 방언) 집에선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라며 부러워하였다. 그 팀장도 몇 달 후 대구 시험장에서 합격했다고 전 직원들에게 음료수 한 병씩 돌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슴 "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