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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runner Mar 03. 2023

3.1 [방황기]익숙해져 버린 시간 버티기

사랑으로 사는가? 정으로 사는가?

 오래된 연인들 중 연애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이게 좋아서 만나는 건지, 지금 만나고 있으니까 좋은 건지 헛갈린 경우가 있다. 결혼생활도 오래 지나다 보면 사랑으로 사는지? 정으로 사는지? 헛갈릴 때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뜨거운 열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이란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의 익숙함이라 말하겠다. 

특히 미운 정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라 말할 수 있는데, 미운 정은 영어식으로 표현하기 어려움이 있다. 서구권 문화에서는 미운 정이라는 것이 좀 이해하기 어렵다. 


“정이란 개념이 참 오묘하고, 독특하다. 영어, 불어 사전을 뒤져봐도 번역할 길이 없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e Le Clezio, 1940~)


정이 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정이 발달한 이유는 우리나라 사회가 단일 민족이고, 백의민족이기 때문에, 한 두어 단계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가 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땅이 좁은 것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결혼을 해왔기 때문에, 또한 예전부터 한 지역에서 모여 살았기 때문에(과거 교통이 발전하지 못해서), 공동체적 사고방식- 두레 품앗이 같은 함께 해야 하는 문화등이 어우러지다 보니 생긴 ‘우리’라는 개념이 강해졌다. 그래서 우리 아빠, 우리 엄마, 우리 아들, 우리 딸이라 부른다. 엄연히 말해서 우리가 될 수 없는 것에도 우리를 붙인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 우리 아빠라고 한다. 엄연히 내 아빠다. 영어로 My father이지, Our father 가 될 수 없다.      

요즘은 감정노동자에게 당신의 가족입니다. 하는 것도 우리나라만의 "정" 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저 사람이 나의 사돈의 조카라던가, 내 친구의 친척이라든가, 몰라서 그렇지 좀만 깊이 파보면 나와 연결될 수도 있다. ‘우리가 남이가’, ‘조사하면 다 나와’. 이런 것이 "정"의 문화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알기 전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기 때문에...

아마도 좀 더 사회가 도시화되고, 다문화, 다민족화, 다변화된다면 점차 그런 "정"의 문화는 약해지겠지만, 아직까지도 "정"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미운 "정"은 서로 다른 점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 가면서 생긴 익숙해짐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그런 행동, 행위나 말투, 생활방식, 사고방식 등 나와의 차이 나는 것이 싫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버려서 그 사람은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하리라 예상이 된다. 더 이상 그를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 미운 "정"이 아닐까 싶다. 정들다. "정"은 갑자기,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 물드는 것이다. 

사랑처럼 첫눈에 반하거나, 갑자기 빠지거나, 나도 몰래 생기거나, 어느덧 피어나거나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색깔이 조금씩 베여 나와, 나에게 서서히 물들어서 내가 변하고, 나의 색깔이 조금씩 베여 나와 그 사람을 물들이는 것이다.      

마치 우리 아버지가 주무시기 전 술 한잔하고 주무시는 게 어머니로써는 못마땅 하지만, 그래도 속 버릴라, 좋은 안주를 준비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연인사이에 담배를 끊는 문제을 가지고, 다투는 경우가 종종 봤다. 여자는 담배를 끊으라 하고, 남자는 끊겠노라고 말하지만 끊지는 못한다. 예전 회사에도 그런 후배가 있었다. 여자친구에게는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고, 회사에서는 담배를 몰래 피운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담배를 나무젓가락으로 집어서 연거푸 2~3개비를 피운다. 손에 담배 냄새 배지 않게 하려고... 그리고 양치를 하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 나무젓가락에 담배꽁초를 피우는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피워야 하느니 차라리 끊는 게 낫지 않겠냐... 그렇게 해도 담배를 한 번도 피워보지 않은 사람은 몸에서 나는 냄새로 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배 왈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다른 사람이 피울 때 옆에서 있다가 밴 거라 하면 돼요.”

“여자친구가 모를 것 같냐?”라고 물어보니, “모른다”라고 한다. 나는 여자친구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도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지금은 만나고 있고, 정이 들었기 때문에 알면서도 그 후배를 위해 모른 척해주는 거라 생각이 든다. 학창 시절 참고서, 책사야 한다고 돈 받아서 용돈으로 써버린 기억처럼...     

회사에서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미운 정이 든다. 처음에 입사할 때의 열정과 패기는 서서히 사그라진다. 초심을 잃지 말라고 하지만, 초심은 잃어가게 마련이다. 당신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인 회사가 변화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냥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원래 법인이란 그런 감정이 없다. 당신이 헌신적으로 일했었도 회사는 달라지지 않는다. 1년 정도 지나고 나면 당신도 깨닫게 된다. 연인사이에 처음에 만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1년 정도 지나서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지는 않는다. 손을 잡고 길을 걸어도 더 이상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는다. 계속 그렇다면 아마 그 만남을 지속할 수 없을 테고, 빨리 병원을 가봐야 한다.      

이제는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설렘을 느낄 수 없다고 사랑도 없는 것이 아니다. 손을 잡아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고 또 그런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은 어리석다. 이미 서로에게 물들어 있기 자신의 색과 그의 색이 닮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설렘으로 시작해서 익숙해져 버린 시간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버텨야 한다. 

"정" 이란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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