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그늘과 체온, 그리고 여름의 조용한 연대

by 낙화유수

이 더위에 말을 건네는 건 미안한 일이 됐다. 내 안부를 묻는 대신, 모두는 고개를 떨구었다. 숨이 찬다. 말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눈빛만으로 안부를 묻고, 대답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과, 등에 맺힌 습기. 바람은 멈췄고, 시간은 눅진하게 눌러앉았다. 이 계절은 사소한 것마저 견뎌야 하는 싸움처럼 만든다.

[이미지 1: 그늘 아래 고양이와 노인. 대조적인 빛과 그림자, 짧은 평온]


며칠째 계속된 폭염에 동네 고양이들도 말을 잃은 듯하다. 집 앞 가로수 밑, 익숙한 고양이 한 마리가 혀를 내밀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이 근방에서 자주 마주치는 할아버지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러게, 그늘 하나가 참 귀한 날이야."

노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은 고양이에게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스치듯 지나치며 묘한 위로를 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여름의 한때. 그늘 아래서 마주한 존재들처럼, 누군가는 그렇게 오늘을 견디고 있었다.

[이미지 2: 실외기가 나란히 붙은 골목. 회색 벽과 태양의 열기]


조금 더 걸으니, 골목 벽을 따라 실외기들이 줄지어 있었다. 낮게 윙윙거리는 소리와 뜨거운 바람. 도시의 여름은 점점 나무보다 실외기가 더 많고, 그늘보다 햇빛이 더 많은 계절이 되어간다. 에어컨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날들. 그 앞에서 '버틴다'는 말이 더는 과장이 아니게 느껴진다.

문득, 오래전 여름이 떠올랐다.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들이미는 형제들, 부채질하다 잠드는 할머니, 그리고 대청마루에 엎드려 있던 강아지. 그 시절의 더위는 견딜 수 있는 무언가였다. 지금의 더위는 인간을 시험하는 것처럼 날카롭고 무섭다.

무심코 들어간 편의점.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진열대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중, 누군가의 어깨가 스쳤다. 젊은 남자였다. 그는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집더니, 나를 보며 건넸다.

"이거, 괜찮아요. 덥죠?"

[이미지 3: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손. 젖은 손등에서 튄 햇살,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녹아내린 다정함]


그가 건넨 건 평범한 바닐라바였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웃으며 받았다. 손끝이 스쳤고, 얼음처럼 차가운 포장지에서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불쑥 건넨 다정함 하나가, 땀이 흐르던 마음을 식혀주었다. 말보다 행동이, 온도보다 마음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교류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편의점 문을 나서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은 어쩐지 무심했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이미지 4: 정오의 도심, 멈춰 선 사람의 실루엣. 아지랑이와 빛의 떨림]


며칠 전에는 또 다른 장면이 있었다. 횡단보도 앞, 유모차를 밀던 엄마가 갑자기 우산을 돌려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집을 부리듯 다시 우산을 들이밀었다.

"괜찮아요. 아이는 그늘 안에 있어요. 어른이 더 위험하대요."

그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 다정한 말은 기억에 오래 박힌다. 폭염의 나날 속에서 가장 선명한 기억은 온도계의 숫자가 아니라, 그런 작고 조용한 배려였다.


오늘도 무더웠다. 뉴스는 기록적인 폭염이라 했고, 누군가는 도로 위에서 쓰러졌다는 속보가 들려왔다. 바람 한 점 없던 오후, 쓰레기차를 따라 걷던 환경미화원이 땀을 훔치며 물을 들이켰다. 그 순간, 옆 건물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했다. '물이 더 필요하지 않냐'며 건넨 생수 한 병. 그걸 본 나는, 괜히 목이 메었다.

한참을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 섰다. 앉을자리조차 없는 공간에서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옆에 있던 학생이 조용히 자리를 내주었고, 할머니는 작은 손짓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누가 보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카메라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인간이었고,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런 순간들로, 이 여름을 버티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걷는다. 땀이 흘러도, 머리 위 태양이 사납게 내려앉아도, 멈추지 않는다. 매일 반복되는 폭염 속에서도 작은 배려 하나에 숨이 트이고, 익명의 온기에 마음이 살아난다. 어쩌면 여름을 버틴다는 건, 그렇게 작고 사소한 다정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혼자 있지 않다는 걸, 잊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이 여름을, 숫자가 아닌 손끝으로 기억하고 싶다. 뜨거웠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그늘이었다고. 계절은 지나가지만, 어떤 여름은 오래 남는다. 숫자가 아닌 장면으로, 땀이 아닌 체온으로, 열기가 아닌 마음으로. 그리고 그 여름은, 바로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간일지 모른다.

이 여름이 지나면, 어떤 기억이 남을까. 폭염보다 뜨거운 손끝 하나였기를.



이 글이 당신에게 닿았다면, 응원의 하트 하나가 내일을 견디는 그늘이 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별똥별의 속삭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