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시작

손에 남은 잔해의 무게

by 낙화유수

안동댐 상류
물안개가 고요하게 수면을 감싸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단순히 흩어진 하얀 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빛과 냄새와 소리가 전부 달라진다. 해가 뜨기 전, 바람은 숨을 죽이고, 나는 벨리보트 위에 무게를 싣는다. 손끝에 닿는 낚싯대의 코르크 손잡이는 세월에 물든 어둑한 색이었다. 처음엔 밝았던 황갈색이지만, 15년 동안 땀과 비와 진흙이 스며들어 검게 변했다. 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었고, 그 모든 시간이 이 손잡이에 박혀 있었다.

코르크 손잡이 클로즈업. 낡았지만 단단하고, 표면의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질감.


로드 거치대에는 다섯 개의 낚싯대가 빽빽하게 꽂혀 있다. 각각의 낚싯대에는 다른 루어가 준비되어 있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전술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첫 캐스팅은 바이브레이션. 멀리 날아가 물속 깊이 잠수해 바닥을 긁으며 배스를 자극하는 루어다. 손목을 비틀어 원을 그리듯 스윙하자, 루어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순간, 라인이 허무하게 가벼워졌다. 뭔가 이상한 낚싯대의 무게. 바이브레이션은 물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손에는 끊어진 라인만 날리는 낚싯대만 남았고, 그 허무함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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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레이션 루어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순간, 낚싯대 끝에서 라인이 풀린 장면.


그 감각은 낚시꾼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종류의 상실이었다. 15년 동안 쌓아온 경험이 말해준다. 이건 단순한 장비 문제가 아니라, 오늘 하루의 시작이 예고 없이 무너지는 신호일 수 있다는 걸. 나는 고개를 숙여 로드 거치대의 다른 대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한쪽 구석에 구겨진 비닐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건져 올린 폐비닐이었다. 로드에 걸린 걸 풀기도 힘들었고, 돌아와선 ‘다음에 치우자’며 그대로 거치대에 꽂아뒀던 걸 깜빡하고 오늘 가져온 것이다. 이 비닐은 배스낚시 필드의 현실이었고, 어쩌면 내 지난 시간의 잔해이기도 했다.

낚싯대 끝에 얽혀있는 찢어진 폐비닐, 물기와 흙이 말라붙어 있음.


바람 한 점 없는 수면 위, 멀리 왜가리 한 마리가 발을 물에 담근 채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노를 천천히 저으며 포인트를 옮겼다. 벨리보트 위에서의 이동은 느리고 묵직했다. 물결이 옆으로 흘러나가고, 그 위로 빛이 부서졌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라인의 촉감, 캐스팅할 때의 팔꿈치 관절의 각도, 발끝 오리발질 할 때의 압력까지—모든 게 계산과 감각 사이에서 오갔다.


다시 캐스팅. 루어가 수면에 닿는 순간, 라인이 미세하게 떨렸다. 물속 바닥의 돌과 나뭇가지가 루어의 몸체에 부딪히는 감각이 손잡이를 통해 전해졌다. 그것은 마치 깊은 곳에서 전해오는 심장박동 같았다. 이때, 사람은 이상하게도 현실에서 멀어진다. 손끝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동안, 머릿속에선 다른 장면이 켜졌다.


약을 삼키던 아침의 주방, 흐릿하게 열린 창문, 그리고 지난겨울 얼어붙은 수면 위를 걸었던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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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바이브레이션이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장면, 주변에 나뭇가지와 돌이 흐릿하게 보임.



그날 왜가리는 끝내 날아가지 않았다. 나와 같은 이유였을까. 움직이면 기회를 잃는다는 걸 아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정지. 그 정지 속에서 시간은 길게 늘어졌고, 나의 하루는 그 위에 가만히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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