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약 & 물결

물결은 고요했다

by 낙화유수

여덟 해째다.
아침보다 먼저 먹는 건 물이 아니라 약이었다.
하얀 알약 하나, 연한 분홍 알약 하나.
작고 둥근 알약이 손바닥 위에서 굴러다니다가, 결국 혀 위로 떨어졌다.
혀끝에 닿기도 전에 쓴맛이 퍼졌다.
그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오늘 하루가 어디쯤에서 무너질지를 미리 알 수 있었다.

약은 나를 버티게 했지만, 살아있게 하진 않았다.
그저 하루를 ‘통과’하게 만들 뿐, 무언가를 ‘살아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종종 생각했다. 이 약이 없으면, 나는 어디쯤에서 멈춰버릴까?
그리고 그 멈춤은, 누군가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지나가겠지?

그럼에도 오늘은 달랐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밤새 문득문득 깨어나던 날들과 달리,
오늘은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머릿속이 조용했다.
차가운 공기가 창문 틈새로 스며들었고, 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약의 잔향이 옅어졌다.
폐 깊숙이 내려앉은 공기가 속에서 천천히 데워져, 다시 입김으로 흩어졌다.
그 과정이 마치, 오래 잠겨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의식 같았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여전히 피곤했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오랜만에 빛이 묻어 있었다.
그 빛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늘은 물 위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왔다.
마치 그곳에, 내가 찾아야 할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벨리보트를 끌고 슬로프까지 걸었다.
손잡이를 쥔 손끝이 서서히 시렸지만, 그 시림이 오히려 기분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발걸음마다 자갈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고요한 새벽공기에 흩어졌다.

b3e75d76-5902-4ddc-b902-c99c16df48f1.png

물안개 낀 새벽 호수 위에 고요히 떠 있는 벨리보트 한 대. 수면은 잔잔하고, 안개가 부드럽게 번짐.


멀리 산등성이 위로 희미하게 새벽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물 위에는 얇은 안개가 깔려 있었고, 호수는 거울처럼 숨을 삼키고 있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숨소리마저 물 위에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 고요가 내 안에까지 번져와, 오늘 하루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바라봤다.
수면은 종이처럼 매끄러웠다.
그 위에 떠 있는 벨리보트는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 같았다.
그리고 오늘 그 그림 속으로 내가 들어갈 차례였다.

“오늘은 꼭 큰 놈 하나 건져야지.”
뒤에서 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느렸지만, 그 속에 묘한 확신이 섞여 있었다.
민호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긴장보다 설렘이 먼저 묻어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살아있다는 걸 꼭 확인하자.

오리발을 물에 담갔다.
차가운 물이 발목을 감싸고, 그 차가움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첫 오리발 질을 하자, 물결이 얇게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새로 별빛이 스며들었고, 별빛 아래 물속 어탐기 화면이 빛났다.

c6468404-03a7-4a18-abad-4c5a0449bcd8.png

어탐기 화면 속에 흐릿하게 드러난 수몰 마을의 건물 잔해. 무너진 담벼락, 기울어진 기둥, 지붕이 사라진 건물의 뼈대.


폐허처럼 쓰러진 수몰 마을의 윤곽이 드러났다.
담벼락, 무너진 지붕, 기울어진 기둥.
물속이라 소리가 없는데도,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귀 안쪽이 먹먹해졌다.
그곳은 내가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던 어느 날과 닮아 있었다.
물속의 건물 잔해 위로 작은 물고기들이 흩어졌다.
그 움직임마저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마음 한구석이 파문처럼 일렁였다.

민호가 미끼를 던졌다.
“이 자리는 예감이 좋아.”
그가 웃었고, 그 웃음이 물결을 타고 내 쪽으로 번졌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볼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겨울의 차가움과 새벽의 부드러움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온기를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첫 입질은 생각보다 빨랐다.
낚싯줄이 살짝 긴장되더니, 순간적으로 손끝으로 강한 진동이 전해졌다.

4300c853-e162-4f6f-8cd2-5345dce0435b.png

낚싯대를 세운 주인공의 손끝으로 전해지는 강한 진동. 손과 로드 클로즈업, 물결 위로 빛이 반짝임.

그 진동은 마치 오래 잊었던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손목이 저릿하게 울렸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순간, 나를 짓누르던 무게가 가볍게 풀리는 듯했다.
그 짧은 순간이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나는 로드를 세우며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이 약 없이도, 물 위에 설 수 있을 거라고.

물결은 고요했다.


그 고요 위에, 나는 살아있음을 썼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입원은 아니래요, 그냥 무너졌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