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두 사람
“잠깐만!!!!!”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두 사람은 나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달려가려 했지만 다리가 굳었다.
놓칠까 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본다.
베개 옆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는다.
손에 잡히지 않자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에 의지해 바닥을 더듬는다.
손 끝에 딱딱한 감촉이 닿는다.
벌써 세 번째다.
꿈속에서 두 사람을 본다.
정해진 주기는 없었다.
한 사람은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거나
한 명씩 나타나거나
멀어질 땐 다시 둘이 되어 사라졌다.
더 이상한 건, 꿈인데도 그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1화 - 기류
“팀장님, 회식 또 안 가세요?”
퇴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내 방에 찾아온 이대리.
나는 대답 대신 노트북을 덮었다.
“오늘은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요.”
“재밌게 다녀와.”
짧게 말하고 재킷을 걸쳤다.
붙잡지 못할 걸 알기에, 이대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
퇴근 후 곧장 헬스장으로 향한다.
러닝머신 위에서 30분.
속도를 올릴수록 머릿속은 조용해진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
내가 운동을 놓지 못하는 이유.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늘 같은 밤이 나를 기다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나는 방향을 튼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있는 오래된 만화방.
간판 불빛은 반쯤 나가 있고,
출입문 손잡이는 손때로 반질거리는 곳.
문을 밀고 들어가면 종이 냄새가 먼저 날 맞이한다.
이곳에 오면 시간을 잊는다.
아니,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다.
어디에서도 나를 찾는 이는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적어도 내게 읽히는 존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하늘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몇 걸음 못 가 폭우가 쏟아졌다.
계단을 뛰어올라 문을 열었다.
‘.......‘
이상하게 조용했다.
형광등 불빛만 희미하게 번지고,
카운터엔 아무도 없다.
젖은 소매를 털어내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벽 한쪽이 눈에 걸렸다.
‘어?......’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왔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건 놔둬. 저대로 버티게.”
돌아보니, 주인아저씨가 서 있었다.
손에는 김이 오르는 커피 두 잔.
“그냥 두면 떨어질 거 같은데요.”
“안 떨어져.”
아저씨는 웃으며 내 앞에 한 잔을 내려놓았다.
“이리 와. 이거나 마셔.”
나는 잠시 액자를 바라봤다.
조금만 건드리면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각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저대로 버티게.
2화 - 꿈
나는 또 그곳에 서 있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공간.
사방이 희미한 빛으로 젖어 있다.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빛에 가려 윤곽만 어렴풋하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다.
작은 실루엣이 춤을 멈추고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보고 웃는 건가.
처음 들어본 목소리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하얗다.
웃음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내 손 위로 작은 온기가 포개진다.
낯선 촉감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을 빼자, 또다시 감싸오는 작은 온기.
“엄청! 엄~청 보고 싶었어!!!”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울림이었다.
알고 싶었다.
낯설지만 햇살보다 따스한 그 아이를.
커다란 내 손에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졌다.
웃음소리가 잦아진다.
아무리 둘러봐도, 방금까지 나를 비추던 그 빛을 찾을 수가 없다.
“아……”
꿈이었다.
소파에서 떨어져 이마를 테이블 다리에 찧었다.
아픔이 느껴지는 걸 보니 꿈에서 깨어난 게 확실하다.
이렇게 아쉬운 꿈은 처음이었다.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존재에 내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3화 - 잔향
월요일 아침.
엘리베이터 안은 늘 그렇듯 숨이 막힐 만큼 가득 찼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8시 정각.
‘띵동.’
1층에서 문이 열렸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스쳤다.
‘어…!!’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숨이 멎었다.
‘향.’
아주 잠깐이었는데도 분명했다.
‘라일락.’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야가 좁아지고, 발끝이 굳는다.
‘말도 안 돼.’
그 향을 잊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다시 맡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
긴 머리, 회색 코트.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보고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았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21층에 멈췄다.
문이 열렸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먼저 내렸다.
망설이다가 나도 따라 내렸다.
‘뭐 하냐. 너 지금…’
스스로에게 묻지만,
이미 시선은 그녀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그때-
“팀장님, 안녕하세요!”
등 뒤에서 직원들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녀가 돌아본다.
창가로 들어온 아침 햇살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그리고,
향이 다시 번졌다.
4화 - 책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내 방 문을 열고 들어 온 이대리.
“어? 아니. 왜?”
“커피도 건너뛰시고, 오전 내내 모니터만 노려보시고.”
우리 팀에서 이대리는 이런 식이다.
사람의 말보다 표정을 먼저 읽고,
동료들의 연애사부터 가족사까지 눈치껏 꿰지만
입이 무거운 편이라 자칭, 타칭 분위기 메이커랄까.
오늘은 그 예리한 안테나를 내게 세운 모양이다.
찝찝함은 딱 질색인 내가 라일락을 지나쳐 버린 아침.
급한 결재만 마무리하고 화면 속 회사 조직도를 확인했다.
없다.
반듯한 사진들 사이를 아무리 찾아도, 라일락은 없다.
21층에 위치한 우리 부서.
조직도를 근거로, 다른 층의 모든 부서에도 라일락은 없다는 것.
회사 직원이 아니라면..
우리 부서의 왼쪽에는 출판사가 있고 오른쪽에는 증권사가 있다.
사람 탐색에 꽝인 내가 눈을 감고 아침의 기억을 끌어 모으는 중이었다.
‘긴 머리, 회색 코트, 그리고…
노트북 가방.’
그것만으로는 특별한 단서가 되지 못했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마셨어? 안 마셨으면 같이 마시고.”
“점심부터 드셔야죠. 오늘 메뉴는 뭘로 할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가까운 데서 먹지 뭐.
초밥이나 먹을까?”
따라 나온 직원 몇몇과 함께 초밥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주문을 하고, 이대리를 필두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
“대리님은 독서하세요?”
테이블 끝에 앉은 막내 사원이 이대리를 보며 물었다.
“독서? 가끔?
웹툰도 독서 맞지?”
이대리의 말에 다른 직원들이 피식 웃는다.
“왜 웃지?
웹툰이 어때서!
근데 갑자기 독서는 왜?”
“아.. 사실 대학 선배가 옆에 출판사에서 근무하거든요.
종종 만나서 밥 먹고 하는데, 만날 때마다 책을 줘서 죽겠어요.”
“독후감도 쓰래?”
이대리의 장난에 옆직원이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 컥컥거린다.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괜찮다고 하는데도 베스트셀러다, 이달의 책이다, 오늘의 작가다…
점점 양이 늘어나요.
받기만 하니 불편하더라고요.”
“예전에 그런 식으로 회사에 몇 번 책을 들고 왔었지.”
아..
이대리 또 시작이다.
“처음에는 예의상 책을 받았는데,
그게 반복되고,
어느새 회사가 아니라 개인들한테까지 번진 거지.
나도 정중히 몇 번 거절했지만,
친절한 얼굴에 인상 쓰기가 어디 쉬워?
게다가 그저 책일 뿐이잖아.
난감한 날들이 계속되고 직원들의 피로감을 어느 날 팀장님이 알아채신 거야. “
묵묵히 밥을 먹는 나를 한번 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이대리.
“직원들에겐 아무 말도 없이 그동안 받은 책들을 전부 방으로 옮기셨지.
그리고는 큰 박스에 천천히 옮겨 담기 시작하셨어.
책을 다 넣고 포스트잇을 뜯어서 뭔가를 쓰시더니 박스 안에 넣으셨어.
그 묵직한 박스를 직접 들고나가시는데..
설마 했지.
아니나 다를까.
옆 출판사 문을 밀고 들어가시는데,
나는 혼자 식은땀이 나더라고.
근데 우리 팀장님이 누구야~
“수고하세요”만 남기고 박스를 내려놓고 돌아오시는데.
이야.
그때 나는 막 짜릿한데, 동시에 도망가고 싶더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막내사원이 물었다.
“어떻게 되긴..
그 뒤로 그쪽에서 발길이 딱 끊겼지.
근데 참 신기한 게 뭔지 알아?
오히려 그날 이후로 다들 팀장님을 궁금해하는 거 같았어.
대체 그 상자 안에 뭐라고 쓰셨는지.”
과장된 이대리의 표정과 장황한 그날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나는 그 일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빛들을 덤덤히 지나치며 나는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
5화 - 라일락
이 회사에 근무한 지도 벌써 10년.
회사의 리스크 관리를 주로 처리해 왔고,
작년 초부터는 컴플라이언스 팀장을 맡았다.
애매한 일들은 대부분 내 선에서 정리됐다.
감정을 덜어낼수록 일은 수월해졌다.
월말에는 업무가 많아져 야근이 반복됐다.
그날은 3일 연속 야근을 한 다음날이었다.
커피 두 잔을 비워낸 오전.
너무 무리한 탓인지 입맛도 없고,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이대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 방문을 열었다.
“팀장님. 점심…”
이대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먹고 와. 배가 안 고파서.”
“네? 조금이라도 드시..”
“다녀와.”
이대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
어쨌든 오늘만은 야근을 피하고 싶다.
운동도 하고 싶고,
집에 가서 야구를 보며 시원한 맥주도 한잔하고 싶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일한 지 사십여분쯤 흘렀을까.
밖이 소란스럽다.
기지개를 켜며 밖을 쳐다봤는데,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내 방은 벽이 통유리라,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안과 밖이 그대로 드러난다.
얇은 유리벽을 넘어 여직원이 문 앞에서 누군가에게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무시하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을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누군가가 ‘라일락’이었으니까.
갑자기 호흡이 빨라진다.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지?”
내 물음에 여직원이 당황하며
“아 팀장님. 책을 받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자꾸 그게 아니라고 하시면서..”
여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일락이 입을 열었다.
“아니, 책을 드리려는 게 아니에요.
전달만 해주시라는 건데.”
그때, 식사를 마친 이대리와 직원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라일락의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아니, 궁금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
나는 라일락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제가 전해드릴게요.
잠시 들어오실래요?”
라일락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 옆으로 더 놀란 눈의 직원들이 느껴진다.
방으로 들어선 나는,
“앉으세요. 차라도 드릴까요?”
이럴 것까진 없다는 표정으로 라일락이 문 앞에 서있다.
“아뇨. 오늘 출판사에 오전 행사가 있는 걸 깜빡했어요.
거기 실장님께 전해드릴 게 있거든요.
문 앞에 서랍장에 넣으라고 하시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부탁 좀 드리려고 했던 거예요.
저도 바로 가야 해서요.”
그 실장이란 사람에게 이곳에 맡긴다는 말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그녀는 지금 여기 있지 않았을 테니까.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들었지만,
희미해졌던 라일락 향이 다시 나를 감싸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방 안에 라일락이 가득 폈다.
오래 눌러두었던 기억들이 동시에 들이쳤다.
내가 기억하는 향과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향이 겹쳐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 현실을 붙잡고 있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시야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폭신한 감촉이 등을 감쌌다.
소파였다.
익숙한 회색빛 소파.
카운터에 앉아 졸고 계시는 아저씨가 보인다.
여기저기 가지런히 쌓여있는 만화책들.
“아저씨..”
깊은 잠에 빠진 걸까.
미동이 없는 아저씨.
다시 한번 힘주어 아저씨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아저씨가 주위를 살피는데,
그 시선이 내게 멈추지 않는다.
“깜빡 졸았네.
비가 온다더니 이곳저곳 쑤시는구먼.”
자리에서 일어선 아저씨가 액자를 바라보고 섰다.
아저씨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닿을 듯 하지만 닿지 않았다.
언제나 입이 무거운 분이셨다.
내게 웃음을 아끼는 법은 없었지만,
말로 사람을 들고 내리고 하지 않으셨다.
왼쪽 눈이 시퍼렇게 퉁퉁 부었던 날에도,
허겁지겁 컵라면을 비우던 날에도.
아저씨는 어떤 것도 묻지 않은 채,
조용히 나를 받아주던 유일한 어른이었다.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아저씨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나는 깨어나지 못했다.
6화 - 쪽지
눈을 뜨자 흰 커튼이 보였다.
둘러보니 어딘지 알 것 같다.
닫힌 문 앞을 지나치기만 했지, 의무실 안은 처음이다.
침대 옆 탁자에 각티슈 하나, 물컵이 놓여 있다.
“정신이 드세요?”
인기척에 놀란 간호사가 커튼을 걷었다.
“아, 네..
얼마나 누워있었나요?”
“두 시간 정도요?
과로 같아요.
오늘은 퇴근하시는 게 좋겠어요.”
이대리가 의무실에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벌써 빌빌거리면 어떡하냐고 눈치를 줬었는데,
‘이런. 놀릴거리가 또 생겼네.’
눌린 뒷머리를 가볍게 털고 이불을 반듯하게 갠 다음,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아! 이거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
간호사가 책상 위에 있던 쪽지를 내게 내밀었다.
‘뭐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쪽지를 펼쳤다.
“괜찮으시면 괜찮다고 문자 하나만 남겨주세요.
010-XXXX-XXXX”
???
주머니를 만져보지만 핸드폰이 없다.
낯선 전화번호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느껴진다.
십 분 같은 일분이 흐르고,
‘띵동’
문이 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내 방으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직원들을 향해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보인다.
‘신경 쓰지 말고 일해.’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주었으면 하는데.
또 내 뒤를 따라오는 이대리.
“진짜 괜찮으세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병원 안 가셔도 돼요?”
이대리답지 않게 장난기가 빠진 표정.
“괜찮아. 잠을 못 자서 그래.
대충 정리하고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갈게.”
“제발 좀 쉬세요.
밥도 좀 드시고요.
아, 근데 아까 그 여자분 누구예요?”
이대리의 말에 다시 머릿속에 불이 켜진다.
방안에 남은 잔향을 찾듯이.
책상 위로 아까 받았던 서류 봉투가 보인다.
‘아.’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핸드폰 연락처에 적힌 번호를 검색한다.
없는 번호다.
“그건 뭐예요?”
답이 없어도 계속되는 질문.
“어 아니야. 어서 가서 일해.
나 진짜 괜찮으니까.”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나중에.
나중에, 이대리.’
“필요하시면 언제든 전화하세요.
혼자 참지 마시고요.”
참지 말라는 그 말이 목에 걸린다.
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간 이대리를 확인하고서
책상 위에 놓인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얀 쪽지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이래도 되나.’
잠시 망설였지만,
무턱대고 전화를 거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서류 봉투 안으로 묵직한 종이의 촉감이 느껴졌다.
앞 장과 다음 장을 확인하고는
꽤 긴 원고라는 걸 알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목록 다음으로
단단하게 채워진 글자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결이 다른 글이었지만,
마치 중요한 보고서를 점검하듯
단번에 펼쳐진 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지금 몰입하지 않으면
나는 무언가를 놓칠 것만 같았다.
마무리되지 않은 글의 마지막 장을 읽고서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마음을 훔친 기분이 들어서.
최대한 손댄 적 없는 것처럼
서류봉투 안으로 다시 원고를 넣었다.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을 챙겼다.
모니터를 끄고, 주변을 정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
직원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문을 나섰다.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걸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 잡는 손잡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까운 곳에 앉은 안경 쓴 직원이 나를 보며 일어난다.
“안녕하세요.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여기 실장님이 누구실까요?”
창가 쪽에 앉은 머리가 짧고, 키가 큰 여자가 일어났다.
“아. 작가님이 만나셨다는 분이 팀장님이셨네요.
저는 최지안 실장입니다.
혹시 작가님이 주신..”
내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가리키며 실장이라는 사람이 말을 흐렸다.
“네. 여기 있습니다.
바로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일이 생겨서요.”
주변으로 나를 향한 시선들이 쌓이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벽뿐만 아니라 곳곳에 책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등을 돌려 나가려는데,
“또 오세요.”
뭔가에 들킨 것처럼 황급히 그곳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주머니 속에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7화 - 갈증
시동을 켜놓고 한참 동안 출발하지 못한 채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애꿎은 쪽지만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빳빳했던 종이가 흐물거렸다.
괜찮으면 괜찮다는 문자만이라도 남겨달라던 라일락.
정신을 차렸으니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 아닌가.
아니.
순간 백미러 안에 비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왜.
‘일처럼 하자, 일처럼..’
흐물거리는 쪽지를 지갑과 함께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핸들을 잡았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바나나를 입에 넣고,
창밖을 바라보며 물 한 통을 비워냈다.
몸속에 피가 이제야 제대로 도는 기분이다.
이것저것 속을 채우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얼마나 잤을까.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잠이 깼다.
여전히 머리가 무겁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지나 있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찍혀 있었다.
예상대로 모두 이대리.
“잤어. 괜찮아.”
짧은 답장을 보내고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통을 또 비웠다.
‘갈증이 가시지가 않네.’
속도 채우고 부족한 잠도 충분히 잤는데,
찝찝한 기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하루 만에 다시 붙잡은 컨디션으로 출근을 하고 밀린 업무를 차례대로 처리했다.
중요한 미팅이 잡혀있었고, 외부 손님 응대에 주말 출장까지.
바쁜 한 주가 흘러갔다.
마음 한편으로 의문 투성이인 꿈과 라일락이 한 번씩 고개를 들었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내느라 떠다니는 구름을 잡아낼 여유가 내겐 없었다.
오늘은 월말.
이번에 기획한 일도 잘 처리되고 성과가 좋아서
오늘 저녁 팀회식에는 참석하기로 했다.
오늘도 안 오면 집까지 따라간다는 이대리의 말이 농담 같지 않기도 했고.
사무실 전등이 하나둘 꺼지고 엘리베이터 앞에 모인 직원들.
회사 근처 소고기집에 갈 생각에 다들 신이 나있다.
잠시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어 잠시만요!!!”
다급한 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낯익은 얼굴이 맨 앞에 있었는데,
그때 출판사에서 서류 봉투를 받은 최지안 실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퇴근하시나 봐요?”
나를 알아본 실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찍 끝났나 봐요.
항상 늦게까지 일하시더라고요.”
넓지 않은 공간에
적지 않은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둘의 대화.
… 불편하다.
“네. 오늘은 회식이 있어서요.”
“그러시구나.
아!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형식적으로 네라고 대답하려다 놀랐다.
‘….?’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자 최실장이 당황하며 웃는다.
“아. 하하.
그때 작가님이 전화로 팀장님 괜찮으시냐고 묻길래.
무슨 일이냐고 제가 귀찮게 했거든요.”
‘띵동’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실장에게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직원들을 따라 회식자리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미안한데. 나 빼고 먹지.
다음에 같이할게.”
“에??? 네??”
직원들에게 뒤통수를 보인채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 도착한 차 앞에서,
조수석 문을 열고 쪽지를 찾았다.
의자 밑으로 떨어진 쪽지가 이리저리 굴러다녀 엉망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뭐가 그렇게 겁이 났을까.
쪽지를 펼쳐
다시 드러난 번호를 핸드폰에 옮겨 찍고서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귓가에 퍼지는 목소리.
“여보세요.”
내 착각일까.
분명 꿈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8화 - 통화
“........”
“여보세요?”
참을성이 좋은 라일락이다.
걸려온 전화너머의 말없는 상대에게
두 번, 세 번 묻고 있었다.
“.. 연락이 늦었습니다.
괜찮다는 문자를 그날 바로 했어야 했는데.”
짧은 숨을 뱉고
일주일 전에 했어야 할 말을 전했다.
잠시 침묵하는 라일락.
“아..
괜찮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날 바로 실장님께 전해주셨다는 말씀 들었어요.
저야말로 감사하다는 인사가 늦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실장님이 원래부터 알던 사이냐고 계속 물어보시더라고요.
아니다, 아예 모른다, 그날 처음 봤다.
몇 번이나 말을 해도 이해하기가 힘들데요.
그럴 리가 없데요.
쿡..
왜 그러시는지 혹시 아세요?”
웃음소리가...
나는 어떤 클라이언트를 만나도,
빗나가는 변수 앞에서도,
좀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귀를 스치며 오가는 대화에서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침묵이 나를 들킬 것 같아서.
“글쎄요.
그건 그렇고..
음..
소설을 쓰시나 봐요.”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의 공기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바로 전해주신 게 아니군요. “
방금 전보다
짧고 단단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관리 잘하시고요.
이만 끊겠습니다. “
당부도 경고도 없었던 그녀의 부탁이었는데
전화너머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단단히 닫히는 느낌이 들었다.
딱 잘라진 그녀의 말을 붙잡기 위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알고 싶어요.”
끊어질 것만 같던 전화기 너머가
아직 비어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다음 이야기요.
주인공은 어떻게 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