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대문

by 이유하

9화 - 선약



아침부터 거의 한 시간째 이대리의 잔소리를 듣는 중이다.

갈 것처럼 다 해놓고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나를 두고.

연기가 늘었다느니

도망자라느니.


피식.

오늘따라 이대리의 투정이 귀찮지가 않다.


“진짜 이상하시네요.

무슨 일 있죠? 네??”


“아니. 왜 또. “


이쯤에서 쫓아낼 거라 예상했는지

뒷걸음을 치며 문고리를 잡는 이대리.


“내일 금요일이니까, 한잔 하시게요.

더 이상 혼자 노시는 건 안됩니다.”


“나 친구 많아. 나가서 일해.”


걸음을 멈추고 웃음을 토해내는 이대리.


‘아 진짜. 저렇게까지 웃냐.’


“팀장님~~~~ 웃겼어요 진짜. 아~~ 하하하”


“미안한데. 내일 선약이 있어.”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지만

사실이다.

그것도 라일락이랑.



어제의 통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해서 맴도는 중이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칼국수 좋아하세요?”


우린 금요일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다.


그 통화를 끝으로

밤새,

그리고 아침동안

몸이 붕 떠있는 느낌이다.


라일락은 내일의 약속에

어떤 의미를 두었을까.


한 사람의 서사를 짐작해 본다.

어떤 삶을 살아내면

그런 글을 쓸 수 있는지.


그녀의 문장이라면,

내 하루쯤은 다른 빛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0화 - 코트 그리고 왼손잡이



길가에 가로등이 하나둘 밝혀지고

창밖으로 차들의 불빛이 늘어난걸 보니

드디어 퇴근시간.

평소와 같은 업무를 하고, 같은 시간에 점심을 먹고

오후 회의를 마쳤는데도

오늘따라 시간이 어쩜 그렇게 더디게 흐르던지.


모니터 앞에서 열중하던 직원들이

이른 나의 퇴근이 낯설어

시계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팀장님, 퇴근하시게요?”


막내사원의 물음에

일에 집중해 있던 이대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어. 퇴근하려고.

어서들 마무리하고 퇴근하지.

금요일인데.”


“에?

금요일마다 야근하시던 분이..”


이대리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문을 열고 나왔다.



약속장소로 걸어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막힐 퇴근 시간.

이 시간에 운전대를 잡는 순간,

도로에 갇히게 될지도 모르니까.



문을 열고 들어선 칼국수집.

이대리한테 맛있는 칼국수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찌나 정성스레 맛표현을 하던지,

먹어보지도 못한 국물의 재료를 읊을 정도랄까.

바쁘다는 핑계로 이곳까지 걸음 한 적이 없었는데.


가게 안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아주머니를 지나자,

그 뒤로 창가옆에 홀로 앉아있는 익숙한 분위기의 그녀가 보인다.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가 나를 본다.


“안녕하세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


“안녕하세요. 저도 좀 전에 왔어요.”


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비어있던 식탁이 하나 둘 채워지고,

우리 사이에 뽀얀 국물의 칼국수가 먹기 좋게 끓고 있었다.


정적이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그녀도 대화를 애써 만들어내지 않았고,

나는 그게 좋았다.


내가 빈컵에 물을 따르자

그녀는 내 앞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답답해진 코트의 단추를 풀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박힌 옷걸이가 보였다.

일어나서 옷을 걸기 위해 벽으로 다가가자


“어? 거기 걸지 마시고,

줘보실래요?”


얼어붙은 나를 본 그녀가 피식 웃더니

내 코트를 가져가 양팔을 하나씩 뒤로 넘겨 접더니

다시 반으로 포갰다.

그리고 내 옆자리 의자를 꺼내 코트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저기에 걸어두면

옷 뒤가 쏙 하고 올라와요.”


얼떨떨해하는 내게


“이제 앉으셔도 돼요.

쿡..”


또.. 그 웃음이다.

마치 비스킷을 한 입 베어 문 듯

’바삭‘ 하고 퍼지는 느낌이랄까.


국자를 들어 한 그릇 가득 칼국수를 담아

내 앞에 놓아주는 그녀.

그 친절함이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아서,

아니, 오히려 편안해서

가만히 따뜻해진 그릇을 바라만 봤다.


그러다 다급히 손을 뻗어

“제가 해드릴게요.”라고 외친 뒤,

그녀의 그릇에 칼국수를 가득 채워 건넸다.



후루룩 면을 입에 넣었다.

진한 국물이 입안 가득 퍼졌고,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맛있네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


오른손에 쥔 숟가락으로 국물을 마시고,

왼손에 쥔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


‘... 어?’


“왼손잡이시네요...?”


그녀가 내 말에

입으로 향하던 젓가락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컵을 쥐고 있던

내 왼손으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


왜였을까.

나는 컵을 집으려다 말고

식탁 아래로 왼손을 내려놓았다.

다리 위에 손등을 눕힌 채로.


“맞아요. 왼손잡이. “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친구가 왼손으로 글씨 쓰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멋져 보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나도 왼손잡이가 될 거야,

마음먹었는데.. 쿡.

덕분에 지금은 양손 다 잘 써요.”



‘탁’


갑자기 식당 안이

정전된 것처럼 깜깜해졌다.


소리가 멀어졌다.


주먹을 쥔 왼손 위로

피가 맺혀있었고,

바닥에도 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지금보다 작은 주먹 위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기억이 잠시 나를 덮은 뒤로

거짓말처럼 국물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글에 대해 묻고 싶었는데,

늦은 연락에 대한 변명도 하고 싶었는데,

필름이 끊긴 사람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괜찮으세요?

저번처럼 안색이 안 좋아요.

그만 갈까요?”


찬바람을 쐬면 나아질 것 같았다.

내가 일어나자 그녀도 일어나 코트를 입는다.

고이 포개놓은 코트를 조금 더 오래 두고 싶었는데.


카운터로 다가가 카드를 꺼냈다.

초인적인 집중력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그런 나를 옆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후 밖으로 나가자 겨울의 찬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았다.

머리가 맑아진다.


“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 “


내 대답을 기다리며

손에 쥐고 있던 목도리를 목에 두르는 그녀.

바로 앞에서 날아오는 라일락향.


칼국수 국물에 묻혀있던 향이

겨울바람을 입어 날고 또 날았다.


‘이 향이…’




11화 - 비스킷 웃음



“어???

눈이에요!”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하얀 눈이 흩날렸다.


“우와! 눈이 오네!

올해 첫눈이죠? 맞죠! 와하하하”


내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그런 다음엔 양손을 펼쳐 손바닥 위로 눈을 가만히 받고 있다.


칼국수집 앞 가로등은 깊은 노란빛을 뿜고 있었는데, 그 불빛 탓인지,

그녀의 표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미소를 따라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펼쳤다.

차갑고 귀여운 것들이 앉았다가 사라졌다.


“소원 빌어요!

첫눈이잖아요!

얼른요!”


이대리가 그랬다면,

한숨 쉬며 분명 한소리를 했을 텐데..


난 지금,

눈을 감고 있다.


소원이라..

글쎄..

잠시 고민하다 실눈을 떠 그녀의 모습을 본다.


두 눈을 질끈 감은채

모은 두 손을 코와 입에 댄 아이가 내 앞에 있다.

갑자기 두 눈이 떠지고 나와 눈이 마주친다.


“벌써 다 빌었어요?

몸은 좀 어때요?”


오늘 저녁동안,

칼국수보다 염려를 더 많이 먹었다.

그녀 덕분에.



“저..

향수.. 뭐 쓰세요?”


처음 마주친 날부터 묻고 싶던 말.


”쿡. “


또 그렇게 웃는다.


내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괜찮은 거죠?

그럼 좀 걸을래요?”


하고 몇 걸음 앞장서서 걷는다.


그녀를 따라 눈 날리는 밤길 속에 나를 맡겼다.


“머리 감길 잘했네요.

샴푸 향이에요.

향이 좋아서 계속 쓰는데..

왜요? 너무 진한가?”


‘아...’


하하하..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말들이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낸 세계의 언어가 아닌 느낌.


머리를 안 감으면

라일락은 사라지는 건가.


“.....????”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멀쩡한 몸으로 쓰러지질 않나.

칼국수를 먹다 멀미를 한 것처럼 굴지 않나.

눈을 맞으며 바보같이 웃지를 않나.


“쿡...”


“아. 왜 자꾸 그렇게 웃는 거예요?

웃다 만 것처럼.

웃을랑 말랑.

뭐예요 그게.”


따지듯이 들렸을까.

내 속을 감추기 위해 너무 날을 세웠을까.

나는 사실,

그 웃음이..

좋았던 건데.


이리저리 정신이 없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아.. 너무 웃기시네요.

와하하... 하하하”


배를 잡고 웃다가 이내 주저앉고 큰소리로 웃는 그녀.


한참을 우리 둘은 눈 오는 거리에서 웃고 또 웃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처럼

만나기 전까지 준비한 수많은 질문지는 날린 채.


그날 밤,

씻고 이불속에서 눈을 감았을 때

우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12화 - 파란 대문



지난번 회식 불참건으로

오늘 점심 결제는 내 몫이 되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뜨끈한 국물로 속을 달래기 위해 직원들과 향한 곳은

회사 건너편에 있는 갈비탕집.


손을 들어 식당 직원을 부르는 이대리.

주문을 마친 이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구석에 세워진 옷걸이로 다가간다.

뾰족한 옷걸이에 코트를 툭- 내리꽂는다.


‘아...’


자리로 돌아오는 이대리를 향해


“이대리, 코트 줘봐.”


‘....??’


“에? 코트요? “


답답하단 눈빛을 날린 뒤,

옷걸이로 걸어가 이대리의 코트를 구조하기 시작한다.

갈색빛 코트의 양팔을 접어 뒤로 넘긴 후,

반으로 고이 포갠다.

그리고 테이블에 남은 빈 의자에 올려놓는다.


”팀장님~ 그거 대충 놔도 되는데.

갑자기 왜 그래요?

나 뭐 잘못했나??? “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대리.


대꾸도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컵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깍두기를 한 개 입에 넣었다.


나의 행동을 눈으로 가만히 좇던 이대리가


“주말에 뭐 하셨어요? “라고 묻는다.


”아무것도. “


”금요일에는요?

약속 있다고 하셨잖아요.”


참 집요하다.

근성은 업무에만 활용했으면 하는데.


“응. 약속 갔다 왔지.”


“무슨 약속이요??

친구?? “


단답형으로 툭툭 끊기는 상사의 일상이 뭐가 그리도 궁금할까.


”말해도 모르는 사람이야. “


사실이니까.


”그 모르는 사람이 심상치 않은 이 느낌~

아침에는 커피를~

점심에는 코트를~

오늘따라 뭔가 이상한 이 느낌~“


‘아...

갈비탕 언제 나오나.’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 위에 모니터를 켰을 때

식당에서 나를 놀려대던 이대리의 말들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금요일을 전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에 알림음이 울리고

화면에 나타나는 라일락의 메시지.


“네. 이제 먹으려고요.

맛있게 드세요.”


식당으로 가기 전,

점심 맛있게 먹으라는 문자를 라일락에게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썼다, 지웠다를 몇 번 반복한 문자였다.


‘피식’


오늘은 머리를 감았을까,

문득 생각이나 웃음이 났다.


“와.”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언제 왔는지 이대리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뭐야. 왜.”


“서운하려고 해요.

같이 좀 웃읍시다.”


몇 마디 날리려는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가 앉는 이대리.


배가 부르자 살짝 졸음이 밀려온다.

의자에 몸을 더 깊이 묻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어둠이 내리깔린 길 위,

헤드라이트만이 앞을 밝히고 있었다.

새벽의 기운이 차 안에까지 스며들었을까,

정적이 가득하다.


한참을 달린 차 속에서

뒷좌석에 잠들어있던 소년이 눈을 뜬다.

두리번거리며 창밖을 살피더니 입가가 내려앉는다.

몸을 웅크린 아이가


“안 가면 안 돼?

엄마 따라가면 안 돼?”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소년의 아버지는 말이 없고,

그 옆에 앉은 소년의 어머니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방학마다 갔잖아.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있어.”


한번 더 떼를 써볼 법도 한데,

싫다고 악이라도 썼으면 좋겠는데,

뒷좌석에 앉은 소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춰 서고 세 식구가 내렸다.

골목길 끝에 파란 대문을 넘었을 때

마당에 나와있던 할머니와 남자 어른, 그리고 그의 식구 몇이 함께 서 있다.

봐도 봐도 낯설기만 한 사람들.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폭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손과

문고리를 잡은 작은 손,

방바닥에 퍼지던 한숨까지.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 차에 올라타고

파란 대문 안에 소년만이

또다시,

남았다.


여느 아이들에게든 공평히 반가워야 할 방학이

소년에게는 미리 보는 지옥이라면,

지옥이었다.


한여름의 물장구,

붉은빛의 수박 한 통,

겨울날 처마밑의 고드름,

눈덩이를 굴려 만든 눈사람 따위의

자연스레 뜨고 지는 더위와 추위의 온갖 것들이

소년에게는 와닿지 못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소년을 할퀴었던 건,

모든 걸 알고서도

말이 없던 할머니.


그 남자의 말도 안 되는 폭력이 잠잠해 지고 나면,

그들의 일방적이고도 기나긴 부재가 끝나고 나면,

뒷마당에서 방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할머니의 담배연기.


향도, 연기도

지독하게 아팠다.

공기 중으로

모든 걸 감춰버려서,

쉽게 흩날려버려서.




13화 - 아저씨



그녀와의 만남이 이뤄지고 맞는 첫 주말.

헬스장에 가서 두 시간 운동을 하고, 만화방에 갈 생각이었다.

이번 주 내내 아저씨가 왠지 모르게 보고 싶었다.


골목길에 자리한 붕어빵을 파는 할머니께 다가갔다.

지난번과 똑같이 슈크림 붕어빵 네 개를 샀다.

어두워진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전구 갈아드려야겠네.’


손이 닿지도 않은 문이 벌컥 열리고,

아저씨의 얼굴이 보인다.


“저 오는 거 아셨어요?”


“여기 있으면 발소리로 웬만한 사람은 짐작이되.

한동안 뜸하더니,

주말 저녁에 뭐 한다고 또 와.”


“에? 제가 슈붕 사 왔는데 그러실 거예요?”


“.... 슈붕?.. “


“저번에 좋아하셨잖아요.

팥보다 부드럽다고.

슈크림 붕어빵이요.”


봉지에서 붕어빵을 하나 꺼내 아저씨에게 건넸다.

한입 베어 문 아저씨는 찻잔을 꺼내 뜨거운 물을 따랐다.


‘... 어?’


지난번 기울어진 액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꼿꼿이 제자리에 박힌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못 다시 박으셨어요?”


아저씨가 병에서 꺼낸 유자를 잔에 옮긴 뒤 티스푼으로 묵묵히 젓고 있다.

유자향이 퍼진다.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건,

균열이 멈췄다는 뜻이기도 해.

다시 위태로워질지, 아닐지는... 자네 몫이야.”


“네???”


“이젠 자네가 자네를 돌볼 수 있어.

....

그래야.. 누군가를 지킬 수 있지.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 떠나세요? “


“나는 이제 늙었어.

여기도 곧 정리할 생각이야.

자네가 이곳에 오는 시간이 뜸해질수록

나도 한결 가벼워지고 있어.”


”... 여기가 없어져도

제가 아저씨 뵈러 갈게요.”


“나를 왜 찾아와.

녀석, 참. “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갑작스러웠다.

아저씨와의 이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당연히.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되는 곳이었다.

오랫동안 나를 품어준 곳.

오랫동안 나를 감싸준 사람.



정박을 허락해 주던 항구가

어느새 내 손에 노를 쥐여주었다.




14화 - 최지안 실장



주차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탄 뒤 1층 버튼을 눌렀다.

카페에 들러 회의 때 마실 커피를 포장할 생각이었다.

대부분 이런 일은 직원들이 알아서 챙기지만,

오늘은 왠지 내가 하고 싶었다.


주문을 마치고 한쪽 기둥에 기댄 채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출근하셨네요??”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순간 누구지 싶었다가,


‘아. 출판사.. 최지안 실장.’


요즘 부쩍 마주친다는 생각을 하며, 인사를 했다.


“주문이 밀렸나 봐요.

전 한잔만 시켰는데 아직이네요.

팀장님은요?”


“아. 저는 직원들꺼 같이 시켰어요.”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 최지안 실장.


“의외신데요?

커피를 사가시는 팀장님이라.”


나도 모르게 그 말에 미간이 꿈틀 했던 것 같았다.


“하핫. 역시 뻔한 캐릭터가 아니셨네요.”


...?


물어봐주길 원하는 표정 같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더 궁금한 게 없었다.


그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최지안 실장.


“요즘 놀라는 중이거든요.

뭐든 일처럼 하시는 분 같았어요.

관계도, 시간도, 뭐든요-

좀처럼 웃지도 않으시고.

그런 분이..

언제부턴가,

예상을 어긋나게 스윗하셔서요.”


’ 흠..‘


읽히는 건 딱 질색인데.

적수를 만난 느낌이랄까.

상대는 출판사 실장이다.

읽어내기가 특기인.


“그런 거 없어요.

생각하지도 않고.”


무심히 답변을 흘렸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짢아하지는 마세요.

아시다시피 직업이 이런걸요.

주종목이 발견이라..

꼭 같은 업무를 처리해야 동료인가요.

매일 같은 층에서 오며 가며 얼굴 보면 그것도 동료라고 생각해요.

내적 친밀감 뭐 이런 거죠.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은 마시고요. 하핫“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최지안 실장의 말에 은근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매일 업무적인 대화만 오가는 나의 하루에

짧지만 굵은 소낙비 같았달까.


“사실 그때 책과 함께 넣어주신 쪽지.

제 책상서랍에 있어요.

꽤 인상적이었거든요. “


작년 이맘때였을까.

재작년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대리가 신나게 풀은 에피소드의 그 사건.

묵직한 박스를 들고

처음 출판사 문을 밀고 들어갔던 날.

그 박스 속에 넣은 쪽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음은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회사 특성상 야근과 출장이 잦아

모든 사연을 소중히 대할 시간은 부족합니다.

수고하십시오. “


글쓰기엔 취미도 없었고

수많은 ppt를 기획하며 늘린 업무스킬일 뿐.

그 쪽지 또한 그저 내겐 일의 한 부분이었을 뿐인데.


”분명 거절인데 쪽지를 다 읽었을 땐,

이상하게 웃음이 났어요.

팀장님의 캐릭터를 머릿속에서 다시 수정해야 했죠.

그렇다고 무서워는 마세요~

팀장님도 여유가 찾아오면,

한번 다듬어보세요.

편견도, 기억도, 시선도요-

그러면 훨씬 편안해지실 거예요. “


그 사이 우리의 진동벨이 차례로 울렸다.


오랜 시간 근무한 공간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숱하게 마주치고 지나친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방금 전의 최지안 실장처럼.


라일락이 날아든 뒤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벌어진 틈 사이에서

뭔가가 시작되었는지도.




15화 - 다즐링 차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밖에 어둠이 희미하게 남아있어서 새벽인 줄 알았다.

오늘 많은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떠올랐다.


라일락과의 약속이 있는 날.

잠이 덜 깬 얼굴로 양치를 시작했다.

지난주,

함께 눈을 맞고 웃던 장면이 거울 앞에 나타난다.


다음 만남엔 차를 마시자고

그녀가 먼저 말했다.


‘차를 마신다라..’


“좋아하는 차 있어요? “


내 물음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그녀가 답했다.


”차는 다 좋아요.

아이스크림도 그 수많은 맛 중에서

골라내야 하는데,

고르다 보면 입가가 올라가요.

차도 그만큼 제게 설레는 일이에요. “


끼니를 챙기는 것만큼 커피가 자연스러운 내게

차를 마시자며 미소 짓던 라일락.


그녀가 작가여서일까.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펴보지 못한 책을 처음 넘기는 기분.

익숙한 만화방에서

한 번도 기웃거리지 않았던 장르를 펼친 기분.


주말 오전에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는 건 참 오랜만이다.

아니, 지난 몇 년간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회사일 외에 지인을 만나는 건 보통 오후 아니면 저녁시간이었으니.


그녀가 문자로 보내준 찻집의 주소를 네비에 찍었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하늘이 너무나 울상이다.


2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다.

꽤 넓은 호수가 자리하고 있는데,

산책하는 사람들,

나들이 나온 가족들,

운동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층에 자리한 찻집 계단을 올라갔다.


칼국수집 문을 밀던 날과는

또 다른 즐거움 같은 무언가가

내게 입혀져 있었다.


오늘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싶어서 서둘렀는데,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킨 채

뭔가에 몰두 중인 그녀가 보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약속 시간은 한참 남아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제가 기다리려고 서둘렀는데. “


나의 이른 등장을 예상 못한 그녀가


“앗!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그러다 제가 늦으면 어쩌려구요.”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서둘러 닫고,

옆에 세워둔 가방을 찾았다.

내가 먼저 가방을 들어 의자에 올려 두며 말했다.


”계속하면 안 돼요?

차는 처음이라..

차분히 음미해 볼게요. “


실례라고 생각했을 그녀지만,

내 말에 또 쿠키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음. 어떤 차가 좋을까요?

계속 좋아지게 하려면...”


그녀의 말에 살짝, 옷 속 어딘가가 두근거린 것 같다.

두려움도,

불안도,

내 앞에 보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좋아하시는 거,

저도 그걸로 할게요.”


입가가 올라간 그녀가 일어서서 카운터로 걸어갔다.

뒤따라 가야 하나, 앉아있어야 하나 망설이다가

자리에 일어서서 그녀가 오길 기다렸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와 앉자,

라일락 샴푸향이 나를 스쳐 갔다.

살짝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잠시 뒤,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고운 찻잔 두 개와

이름 모를 디저트가 함께 우리 앞에 놓였다.


“자~ 제 취향이 맞으실지 모르지만,

한 모금 드셔보세요. “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오는 찻잔을 두 손으로 조심히 들었다.

왠지 시험을 보는 느낌이다.

그것도,

재밌는 시험.


후후 불어 한 모금을 입안에 넣자,

뜨거움이 먼저,

그다음 바로 코까지 퍼지는 차의 향이 느껴졌다.

뭐랄까.

꽃을 먹는다면 이런 맛일까 싶기도 하고,

과일향이 느껴지기도 하고.


두 모금을 마셨을 땐,

몸속 곳곳으로 따뜻한 기운이 전달됐다.


커피의 씁쓸함에서 오는 위로와는 다른,

위로마저 껴안고 마는 거였달까.


내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그건 다즐링이에요.

홍차의 샴페인이라고 불릴 만큼 향이 아주 좋아요.

같이 시킨 디저트는 스콘인데,

먹어본 적 있어요? “


”아뇨. “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포크를 들어

내 왼쪽에 놓아주는 그녀.


자연스럽게 포크를 집어 스콘을 먹으려다가 그만,


”어..

왼손잡이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무거워지려는 내 눈과 입을

그녀가 서둘러 치켜세운다.


“찻잔은 두 손으로 잡으시는데,

내려놓을 땐 늘 왼손이 먼저더라고요.

그때, 칼국수 집에서

의자를 꺼낼 때도,

지갑에서 카드를 뺄 때도요. “


‘아....’


”쿡..

인상 풀고 웃어요.

제가 엄~~ 청 관찰했다는 의미니까요.”


내려두기가 멋쩍어진 왼손을 애써 당겨와

입안으로 스콘을 넣었다.

손위에 아무렇게나 쓸리고 파인 흉터들이

그녀 눈에 띄었을 거란 생각에,

다시 옷 속 어딘가가 두근거렸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려

아까 하던 일을 시작했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에 눈이 갔다.

손이 참 작았다.

그 작은 손에서 큰 세계가 태어난다니.


“차 음미하실 시간 동안만이에요.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곤란해요.

쿡..”


민망함에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 쿠키 같은 웃음소리에

내 왼손을 함께 올려놓았다.



여태껏 나는,

파괴가 되고,

전멸이 되는,

부서짐만 알았다.


하지만,

어떤 웃음은 부서지기도 하는 거였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스콘처럼

노랗고 달큼한 모양도

금세 부서지고 마는 거였다.


오른손을 쓰지 않고 번번이 왼손이 나올 때마다,

내 앞에서 일그러지던 그 사람의 얼굴.


어린 내가,

여린 주먹이 부서질까 봐,

두려움이 아픔을 삼키던 시간이 있었다.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나의 세계에서 가장 어른이었던 사람들에게서

나는 수없이 배반당했으니까.

그리고 내 눈에는,

그 세계에서 가장 약해 보였던 건,

엄마였으니까.


나는 그들처럼,

약한 것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찻잔이 비었을 즈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노트북을 ‘탁’ 하고 닫았다.


그 소리에 기억에서 깬 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기억하세요?

알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다음 이야기.”


‘무슨...?‘


얼어붙은 나를 그녀가 쳐다본다.


“주인공이 안쓰러웠죠?

음..

삶은 여행이라고들 하잖아요.

시작부터 운이 좋으면,

푹신한 호텔 침구와,

맛 좋은 음식들을 매일 만날 수도 있죠.

반대로 운이 나쁘면,

길을 잃거나,

괴한들에게 얻어맞거나,

며칠 굶을 수도 있고요.

시기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공평한 삶이라 믿어요, 저는.


그러니까..

다 쓸 때까지 속단하지 말아 줘요.

주인공은,

실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시원했다.


이대로 라일락과 문을 열고 나가서,

우산 없이 시원하게 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6화 - 엘리베이터



그때의 주말은 마치 여행에서 돌아온 날처럼

뭔가 아련했고,

뭔가 그리웠으며,

그러다가

먹먹해지기까지 했다.


라일락 때문인지,

다즐링의 향에 취한 건지.

그녀와 함께 우산 없이 차까지 뛰는 동안,

이 겨울이 참 따뜻하다는

정신 나간 생각까지 들었다.


조수석에 앉아 비에 젖은 머리를 정리하던 라일락.

한참 동안 비가 쏟아지는 도로 위를 달리다가,

어느 곳엔가 잠시 세웠다가,

그렇게 다시 길 위로 나섰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각자의 곳으로 돌아갔던 그날.


나도 꽤 수다스럽구나, 느끼며

예전과는 달라진 일요일을 보냈다.



월요일 출근 후,

폭풍처럼 몰아치는 전화와 업무를 소화하며

넥타이를 살짝 잡아 빼려는데,


“팀장님,

지금 좀 올라가셔야 할 것 같아요.”


아침에 이대리가 담당한 계약건으로 미팅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풀어진 넥타이를 다시 조이고,

걸어둔 재킷을 챙겨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킷을 입는 동안,

출판사 쪽으로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밖에서도 느껴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동안 못 보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커피라면,

저쪽은 갓 끓인 차 같다는 생각을 했다.


회의실로 들어가 수정할 부분을 체크하고,

맨 뒤 의자에 앉아서 회의가 마무리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무거운 시간이 지나고 웃으며 마무리된 계약에 즐거워 보이는 이대리.


“많이 늘었던데.”


“와.

팀장님 호출하는데,

계약은 모르겠고

문 열고 들어오실 얼굴이 전 더 겁났네요.”


겁났다는 말을 키득거리며 이야기하는

요즘날 흔하지 않은,

순수하면서도 충직한 사람.


문득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내가 나를 놀라 막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려는 그때,

출판사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라일락이다.’


눈이, 입이,

하다못해 손까지 하늘을 향하려는데,

그 뒤로 따라 나오는 최지안 실장이 보였다.


최대한 나대는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해 본다.


“어머. 안녕하세요.”


역시나 최지안 실장이 먼저 인사를 했다.


이대리가 실장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해한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대리, 여기는 최지안 실장님이셔.”


아리송한 표정을 재빠르게 거둔 이대리가 밝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후배, 이환 대리입니다.”


언제 만나도 친근함을 주는 게, 그의 장점.


옆에 선 라일락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같이 마음껏 웃어주고 싶었는데,

뭔가 간지러웠다.

그 탓에 표정이 더 우스꽝스러워진다.


“어!

그때 팀장님 쓰러졌을 때!

그때 그분이시네~ 맞죠??”


친근함과 더불어 그는 역시, 우수한 안테나를 가졌다.

“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최아인입니다.”


“아인씨는 저희가 애정하는 작가님이세요.

팀장님도 기억하시죠?”


최지안 실장의 물음이 나를 향했다.


“아, 네. 그럼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저희 여기 밑에 짬뽕 먹으러 가는데,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둘은 반갑지만,

넷은 부담이라

정중한 핑계를 떠올리려 애썼다.


“같이 드실래요?”


라일락이 조심스레 물었다.


출처의 중요성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럴까요?

같이 가시죠.”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이대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절대 접점이 없을 것만 같던 넷,

엘리베이터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인씨, 머리 묶으니까 더 발랄해 보이는 것 같아.”


그 공기를 깨는 최지안 실장.


“아,,

사실 머리를 못 감아서요.”


“풉!!”


라일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괴한 웃음소리.


최지안 실장과 이대리의 놀란 눈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자꾸만 고장 나는 나를,

이대리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오후가 두려워졌다.


“두 분..

원래 아는 사이죠? 그렇죠?”


최지안 실장의 질문이 날카롭다.


“아, 그때 부탁 들어주신 게 감사해서,

제가 차 한잔 사드렸어요.”


그 소중한 날을,

참으로 친절한 라일락이다.


“우리 팀장님은 차 안 드시는데.

차는 한가한 사람들이나 마시는 거라고.

그 시간에 일이나… 웁..”


이대리의 팔을 움켜 잡았다.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최실장.



“이제부턴 한가한 사람이 돼 보려고.”


이대리에게 작게 중얼거리며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동안의 눈치는 사무실에 몽땅 두고 온 건지,

짬뽕을 먹기도 전에

나는 이미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17화 - 폭풍



월요일이 주는 무게와

점심 식사 때의 일 탓인지.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풀썩- 그대로 쓰러졌다.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풀어 던지고

양말을 벗어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왼손으로 이마를 짚어 눈을 감았다.


기다림보다 두드림이 익숙한 사람,

최지안 실장.


짬뽕을 기다리는 넷의 테이블에서

이대리의 화술에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운동하셨어요?

꽤 깊은 상처였나 봐요.”


예전 같았다면,

무례함을 눈빛으로 상기시킨 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로

내 시야에서 그 사람을 지웠을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라일락이 보인다.

나답지 못한 행동인지,

나도 모르는 나다운 행동인지 모를 내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나를 탐색해 온 이대리조차

묻지 못한 말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한낱 소재가 되기에 충분한 상처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나를,

라일락은 알아챘을까.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는데.


변화는 있지만,

변신은 아직이라.

최지안 실장의 그 말이,

모나게 파고들었다.


”그냥 상처이기만 한건 아니라서요.

궁금한 건,

못 참는 편이시죠? “


뱉어낸 말과 낮아진 목소리는

테이블의 온도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잠시 서로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소리만 느껴졌다.



“못 참는다고 해서,

참아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에요.

상처의 무게는 본인만 아는 거라

단번에 읽어내는 데는 무리가 있어요.”


그 말이 너무도 서운해서

그리고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이라서,

라일락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었다.


서운했고,

또 서운했고,

이내 슬퍼졌다.


그쯤에서 멈춰야 했을까.

왜 오기를 부렸을까.


“짐작할 수 없다면,

섣불러서는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폭풍을 맞아보지 못한 사람은

바람을 친구로 착각하죠. “


다즐링의 향을 머금은 채,

입이 모질게 움직여댔다.


라일락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아닌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라일락은 죄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비겁하게

가장 약하고 작은 것에

여전히 나는,

화풀이 중이었다.



그들이 그 커다란 집에 나를 내 팽긴채

오랜 기간 방치할 때마다,

내 안에 감각들은 더 날카롭게 변해갔다.


이웃집의 밥 짓는 냄새가 끼니마다 담을 넘어왔고,

모든 게 깜깜한 밤이 되면

짐승소리인지 낙엽소리이지 구별할 수 없는 갖가지의 소리들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홀로 보내고 나면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실제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느 날엔가,

그날도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바닥에 엎드린 채 공포를 잊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다.


”끼이익“


잘못 들었을까.

그들이 왔을까.

아무 발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고개를 들어 커튼 사이로 대문 쪽을 바라봤다.

파란 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참았던 허기와 고독에 밀려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쳐나갔다.

발바닥으로 맨땅의 차가움과 거친 흙이 달라붙었다.

숨을 몰아쉬며 대문 밖에 다다랐을 때,

땅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봉지 안에 있던 카스테라와 바나나우유 한 개.

그리고 이웃집 대문 뒤로 몸을 반쯤 숨긴 채 나를 쳐다보던 두 눈.

커다란 눈과 하얀 얼굴의 소녀.


그리고 그때 불어오던 바람결에

내게 전해지던 라일락 향기.


그 향기가 처음으로,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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