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by 이유하


18화 - 사과



일주일이 건조하게 흘러갔다.

나의 공기가 급변한 뒤로,

사무실 블라인드는 하루 종일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눈은 일을 쫓고 있었지만,

머리와 마음은 창문 밖 어딘가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 후로 최지안 실장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어떤 말을 한 후에,

고민을 하거나

후회를 한 적은 드물었다.

나는 늘 타인에게 무관심해왔으니까.


삶의 저편에서

피해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조용히 객석에 앉아,

타인의 삶을 관람하듯 지나쳐왔다.


미안하게도

안쓰러운 이대리는 그 후로 농담을 건네지 않았고,

식사시간이 되면 눈치껏 도시락이나 샐러드를 사무실 책상에 챙겨주곤 했다.

내게 진 그늘이 언제 걷어질지,

어떻게 해야 걷을 수 있을지는,

막막하기만 했다.



볼펜으로 애꿎은 노트를 한참 찍어대다가,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출판사 쪽으로 발에 힘을 주고 걸어갔다.

선뜻 문을 열진 못한 채,

그 앞을 서성였다.


한참을 머물렀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이동하던 최지안 실장이 나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로..”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왜 그렇게 날이 섰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실장님을 함부로 판단했어요.”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잠잠해진 표정으로 최지안 실장이 웃었다.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괜찮아요.

더한 말도 듣고 사는 자리인걸요.

그래도 알아주시니 고마워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네요. “


”....... “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 빙빙 도는 중이다.


말을 마친 뒤에도 내가 가려는 기색이 없자,

가만히 쳐다보던 최지안 실장이 물었다.


“전화해 보셨어요?

사과를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닌 거 같아요.

아니, 사과보다도

마음이요. “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음..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아인씨를 직접 찾아가 봐도 될까요? “


그녀의 얼굴을 직접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전화나, 문자로

나의 진심을 단 일 그램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다.


”역시 행동파시라니까.

근데, 아인씨 지금 서울에 없어요.

어머니 병원에 내려갔을 거예요. “


병원이란 말에,

마음이 풀썩, 내려앉았다.


”.. 병원이요? “


”네. 어머니께서 오래 편찮으셨어요.

자세한 건, 직접 이야기 나누세요.

병원은.. “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잠시 뭔가를 입력한 최지안 실장이 내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일단 가보세요.

거기서 아인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만큼 마음이 아파왔다.


바람을 친구로 착각한다는 모진 나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잿빛으로 일그러지던 고운 얼굴까지.



세상 모든 이가 그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증오만 뺀 채,

모든 사람을 한 사람으로 대해왔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눈과 귀를 가린 채 지나온 걸까.

나는 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그 어린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거였는데.


사무실로 돌아와 급히 책상을 정리한 뒤,

이대리와 직원들에게 마무리를 부탁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

시동 거는 손이 떨려왔다.




19화 - 직진



그녀에게로 가는 길은 멀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오늘 이러려고 어젯밤 그런 알 수 없는 꿈을 꿨을까.


꿈속에서 나는

내 등보다 작은 아이를 업고 있었다.

아이의 몸은 뜨거웠고

나는 어딘가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결국 나는 병원에 닿을 수가 없었는데

차가운 길에 주저앉아

아이를 끌어안은 채 토할 듯이 울기만 했다.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세계에서

내가 누군지도

이 아이가 누군지도 가늠이 안 되는 그곳에서

나는 악을 쓰며 도움을 요청했고,

처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나는 어찌 돼도 좋으니,

제발 이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꿈에서 깨 한참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세계에서 닿을 수 있는 병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쉼 없이 두 시간을 내리 달린 끝에,

라일락이 있을지 모를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고요했다.


주차를 마친 뒤,

병원 입구로 들어가 가운데에 위치한 창구로 다가갔다.

두 명의 간호사가 각자의 일을 하는 중이었다.


“저.. 혹시

최아인 씨라고..”


최지안 실장의 말만 듣고

대책 없이 이 먼 곳까지 달려온 나였다.

정말 라일락의 이름만으로 길이 열리는 곳이라면,

이곳에서 그녀는 어떤 시간을 보냈던 걸까.


“네?

아, 아인씨요?

아까 어머님이랑 산책 나가셨는데.

그런데,

누구시죠?”


부드러운 말투에 경계가 있다.


“직장 동료입니다.

아인씨에게 급히 볼일이 있어서 서울에서 왔습니다.”


“아, 여기 앉아계시면 곧 들어오실 거예요.

입구는 여기뿐이라서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의자로 걸어가려다가,

방향을 틀어 문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요양병원이었다.


처음 와보기도 했고,

낯선 풍경이기도 했다.


상처는 어찌 되었든,

시간이 지나면 겉은 아물기 마련이라서.

병원은 내게 늘 먼 곳에 있었다.


마냥 기다리는 일은 힘들었다.

아니,

기다리는 건

지긋지긋했다.


병원 주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혹시 엇갈릴까 싶어서 몇 번을 뒤돌아보았다.


십 분 정도 길을 따라 걸었을까.

저 멀리 자리한 벤치에

털모자를 쓰고, 담요를 덮고 앉아있는 사람.

그리고 그 옆에 환한 빛의 라일락이 보인다.

둘은, 같은 털모자를 쓰고 있다.


주저 없이 달려온 곳이지만

막상 그녀를 발견하고 나니

발이 얼었는지, 마음이 얼었는지

좀처럼 나아갈 생각이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하니 둘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라일락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아, 제발..


놀란 라일락이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그녀의 움직임에

옆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도 나를 본다.


잠시 후,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어머니.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는 작고 하얀 두 손.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난처함에 어쩔 줄 모르는 라일락.


나를 반기는 귀한 웃음을 힘으로,

한 발, 한 발,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20화 - 빛 뒤에 그림자



“처음 뵙겠습니다. 서재이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동안,

라일락 어머니의 시선이 빠르게 나를 훑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반가워요.

멀리까지 와줬으니 죄송한 게 아니라 나는 너무 고맙죠.

아인아,

이렇게 외모가 수려하다는 말은 안 했잖니? “


어머니는 눈가와 입가가 함께 웃고 있었지만,

말에는 기품과 힘이 느껴졌다.


당황한 라일락이 아까부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전화라도 먼저 하셨으면, 멀리까지 안 오셔도 되는데요. “


”아뇨.

와야 할 일이니까요.

이번에도 늦어서 문제지만요. “


라일락의 표정이 한결 풀어져 보였다.


”그럼~

말에도 분위기가 필요하지~

그땐 눈이 도와줘야 하거든~

상대의 눈에 담긴 진심을 봐야 말이 더 힘을 얻지~“


어머니의 말씀은 노랫말처럼 들렸다.

그녀와의 대화에서도 종종 가졌던 느낌.

그녀의 세계는,

어머니의 세계와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아인아. 엄마 목이 칼칼하네.

여기 보온병에 물 좀 더 받아다 줄래?”


“이제 들어가야지, 엄마.

가서 마시자.”


어머니와 남겨질 내가 걱정스러운 마음일까.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저 주세요.”


보온병을 받아 들려는 내게,


“아뇨. 손님을 시키면 쓰나.

아인아, 어서.”


따뜻하지만 단호한 말투에 그만,

다시 라일락을 쳐다봤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보온병을 든 라일락이 일어났다.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 엄마. “


인상을 쓰며 멀어지는 라일락.

엄마 앞에선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희미해지자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고쳐 질문을 쏟아내셨다.


불편하거나 무거운 질문들은 아니었다.

사실, 본인이 하신 질문에 대한 답 보다도

답을 하는 나의 표정, 태도를 읽어내시는 듯했고..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멀리서 다시 라일락이 모습을 드러냈고,

어머니는 내게 마지막으로 물으셨다.


”여기까지 올 정도면,

우리 아인이하고는 어떤 사이예요? “


어머니의 해사함에 자꾸만 나도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음..

아인씨는 아무런 설명도 없는 저를,

있는 그대로 대해준 맑은 사람이에요.

관찰력이 굉장히.... 다정하달까.

그녀는 말도 안 되는 다정력을 지녔어요.


반대로,

그녀에 비하면 저는 껍데기지만..

제 속을 이제야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왕이면, 단단하고 따뜻한 알맹이로요. “


무슨 말이 입에서 흘러나갔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를 보며 라일락의 어머니가 웃었다.


”아인이는..

아빠 목소리가 조금만 달라져도,

내 입가가 조금만 내려앉아도,

다 알았어요.

궁금한 건 다 만져봐야 하는 애였고,

나도 그런 아인이를 다채롭게 키우고자 애썼는데.

맘처럼 다 되진 않았어요.

약한 내 몸도 안 따라주고..

어린 마음에 내가 어떻게 될까 매일 무서웠는지,

작은 기척에도 얼마나 크게 몸을 사렸나 몰라..


아까워서 아깝게만 키운 시간이 이십 년인데,

죄다 아깝게만 보고 사는 거 같아서 겁이 나요. “


잠시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라일락의 어머니.


”특히 모진 것에 약해.

약한 저를 잘 알아서, 집에 박혀서 글만 쓴 지 오래고..

한 번은 몰래 서랍 속 글을 읽다가 놀랐죠.

온갖 사람들이 그 속에서 날아다니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얘한테 쓰는 건 숨 쉬는 거구나. “



어머니의 이야기에 빨려드는 동안,

라일락은 가까워졌고

보온병과 함께 캔커피가 내 손에 전해졌다.


”엄마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해?

나 오는 동안 한 번도 입을 안 쉬던데. “


딸의 물음에 나를 보며 대답하시는 어머니.


”우리 아인이,

상처 주지 마세요. “


어머니의 단호한 목소리에


“네. “


대답이 생각보다 크게 튀어나왔다.

라일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에,

변화무쌍한 바람을 견뎌 온 그녀가 있었다.




21화 - 쪼개진 귤



별과 달이 선명해지고

다행히도 서울까지 가는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저녁식사를 체크한 후,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과의 인사까지 마친 뒤에야

라일락은 내게로 걸어왔다.


그녀를 옆에 태운 채 서울로 향하는 길.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말도 행동도

너무나 무작위로

그녀를 흔들었을까.

내가 나를

속으로 가만히 꾸짖고 있었다.


한참 후,

가방을 열어 뭔가를 꺼내는 그녀.

작은 움직임이 이어지더니

차 안 가득 올라오는 귤향.

반절로 쪼개진 귤을 내게 내민다.


“고마워요.”


하고 조심스레 받은 귤을 입에 넣었다.

조금의 신맛도 없이

굉장히 단맛이 났다.


단맛에 힘을 얻어 용기를 냈다.


”연락도 없이 와서 놀랐죠.

제가 최실장님을 난처하게 했어요.

그날은..

미안했어요. “


”하나 더 까줄까요? “


”네?..

아.. 네. “


다시 귤을 까기 시작하는 라일락.


”저도 미안해요.

그렇게 나가버릴 것까진 아니었는데.

그 대리님께도.

아까운 짬뽕에게도. “


다시 쪼개진 귤 반쪽이 내게 건네졌다.


“발끈한 팀장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어요.

누군가에게 읽히는 건,

불편하기도 하지만

구부러지는 기회가 되기도 해요.

그걸 이야기해주고 싶었는데,

다음 말이 모질어서

정작 제가 튕겨져 버렸네요. “


입안에 귤을 굴린 채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바람을 친구로 착각한다는 말,

그땐 아팠어요.

제가 헛된 걸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더라고요.

그만큼 제가 간절해 보였다는 뜻 같아서요.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서울로 가는 동안 실뜨기를 주고받듯

그날 이후로 각자가 안고 있던 감정을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혹시..

그럴 때 있어요?

기억 속에 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거나

분명 꿈인데,

자꾸 꿈이 나한테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요.”


“음.. 데자뷰 같은 거요?”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 샴푸향이요.

낯설지가 않아요.


게다가..

언제부턴가

꿈에서 누군가 자꾸 가까이 있어요.

웃고 있다가

아프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은 절절해지고

깨어나면

어디가 현실인지 헤어 나오기가 좀 힘들어요.”


나도 느껴졌다.

횡설수설처럼 나의 이야기가 그녀에게 들릴 거란 걸.

하지만

지금 나는 정말 진심이었고,

이 답답함에 대해 묻고 싶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가녀린 숨을 뱉어냈다.


“꿈은 저도 잘 모르지만....

저는요,

많이 생각하면 꿈이 먼저 와요.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마음이 많이 쓰이는 사람이 생기면

현실보다 먼저 꿈에서 만나게 되더라고요.


주말에 강연이 잡혀 있으면

단상 위에 서있는 꿈을 며칠 전부터 꾸고요.

불편한 사람과 미팅이 있으면

꿈속에서 이미 몇 번이나 차를 마셔요.


그래서 전...

꿈이 미래를 보여준다기보단

제 마음을 먼저 보여주는 것 같아요. “



“그럼…

향은요? “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목소리가 단단했다.

괜히 핸들을 한 번 더 고쳐 잡았다.


“라일락 향.”


앞을 향하던 라일락의 눈이

천천히 내게로 옮겨왔다.


“라일락 향을 쫓으셨던 거예요?

제 샴푸는 자스민 향이에요. “


‘…….!!!!

라일락이 아니었다.‘


그 말이,

크게 실망스럽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손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후회는... 아파요.

그러니 그 향,

너무 오래 붙잡진 말아요.

자꾸 돌아보면

오늘이 흐려지니까. “


어느새 서울 톨게이트가 보였다.

나는 속도를 조금 줄였다.

조금만 더,

이 고요가 이어졌으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언가

이미 시작된 기분이 들었다.




22화 - 포스터 속의 얼굴



평온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단순히 하루를 마치고 또 하루를 맞이하는 일 말고.

성과를 내고 무언가를 잘 해내는 것도 말고.


나 자체가 잘 지내는 날들.


그 중심에는

라일락이 있었다.


우리는 종종 함께 시간을 보냈다.

퇴근 후 미리 찾아 둔 식당을 가고,

잠들기 전엔 그녀가 쓰고 있는 글 이야기를 하느라

보조 배터리를 몇 번이나 갈아 끼웠다.


바다를 즐기는 방법은 많다.

요트 위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힐 수도 있고,

장비를 메고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택한 건,

그저 바라보는 것.

신발을 벗은 채 해변을 걷는 것.

밀려오는 물을 가만히 느끼는 것.


곧 나에게로 불어올 폭풍우를 짐작도 못한 채

그 고요에 머물러 있었다.




폭풍우 예보는 수요일 퇴근길에서 시작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이대리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때 출판사 문이 열리고

최지안 실장과 여직원이 함께 나왔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가 머무는 숫자로 눈을 돌렸다.


“어? 이번 신간이에요?”


이대리가 물었다.


“네. 이 분 아세요?

모르시는 분도 많을 거예요.

인터뷰 때마다 눈물을 보이셔서 애 좀 먹었죠. “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자선사업 하시는 분 아니에요?”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벽에 붙은 포스터 하나.


익숙한 얼굴이 그 안에 있었다.


무섭게 올라간 입꼬리.

어린 나를 꿰뚫던 그 눈빛 그대로.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잠시, 숨이 멎었다.


오래전,

분노가 가득 찰 때마다

속으로 되뇌던 말.


‘구해줘.’

‘도와줘.’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마주한다면

분노에 눈이 멀 줄 알았다.


그런데,

속이 뒤틀렸다.


그 얼굴은,

나를 넘어서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기만,

그 자체였다.


나를 향햔 그 사람의 폭력은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좋은 날엔 덜 맞았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날엔 폭력 이상의,

폭격을 내게 퍼부었다.


방학의 절반쯤,

커다란 여행가방을 잔뜩 꾸려

그들은 여행을 떠났다.

제발 혼자두지 말아달라고 울부짖는 나를 둔 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입을 틀어막은 채 복도 끝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라일락이 내렸다.


놀란 눈동자가

도망치듯 걸어가는 내 등을 쫓다가,

벽에 붙은 포스터로 단숨에 꽂혔다.


그녀의 눈빛이

일렁였다.




23화 - 카스테라



세면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거칠게 가져다가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에 흐릿해진 시야가 선명해지고 있었다.


굳어진 위치를 뒤집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팀장님, 괜찮아요?

제가 들어갈까요?”


‘.. 어떻게…’


오늘은 그녀와의 약속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말도 안 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발소리가 들리고,

세면대 거울에 라일락의 모습이 비쳤다.


꿈인가 싶었다.


급히 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는 그녀.

그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흐르는 물기를 닦았다.


“… 제가.. 실은..”


“일단 나가요.

실장님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다음에 먹자고 말하고 올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따뜻했다.

커다란 몸집을 자꾸만 기대고 싶어졌다.


복도로 나가 벽에 등을 기댔다.

저 멀리 이대리와 최실장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이쪽을 향해있다.


내게서 멀어진 라일락이 그들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카스테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으로 퍼지던 달콤함과 푹신함.

얼굴도 모른 이가 준 선의를

허겁지겁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라일락의 향이 머물던 대문가에서

이것저것으로부터

굶주린 나를,

얼마나 오래 응시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너무 일찍 자라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카스테라의 촉감은 나를 오래 감싸주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 사람이 검은 봉지 속의 빵 봉지를 발견했을 때.

어린 나에게 사정없이 들이닥치던 손바닥.

새파랗게 부어 오르던 어린 나의 얼굴.


작은 새 하나 거두지 못한 당신이

누군가를 구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가.



눈을 떴을 때,

내게로 다가오는 라일락이 보였다.

이대리와 최실장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나처럼 등을 기댔다.


“나만 보면 어쩔 줄 모르시네.

내가 그 정돈가?”


나를 보며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기는 라일락.


울렁거리던 속이 잦아들고,

가라앉던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나는 왼손을 쫙 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등을 보여줬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흔적이 남아서

지울 수가 없어요.

주먹을 쥐면

더 선명해져서

이따금씩 이대로 부딪히고 싶기도 해요.

더 세게,

나보다 더 아프게.”


가만히 손등을 바라보던 그녀.

잠시 후

그녀의 손바닥이 내 손등 위를 덮었다.

작지만 충분히 따뜻한 감촉.


“어렵게 아물었는데

또 탈이 나면 쓰나요.

이 손으로

예쁜 거, 따뜻한 거

많이 해줘요.

지우려고만 말고 덮어줘요.”


그녀의 말을 손이 들었을까.

얼어있던 왼손이 천천히 방향을 돌려

덮여주던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시 시간이 멈춘 느낌.


오랜 정적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답게 사는 거.

그거면 돼요.

나머지는..

지나갈 건 지나가요.


그러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둘 뿐이라 생각했던 복도 끝.

최지안 실장이 팔짱을 낀 채

포스터 속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포스터 속의 얼굴과

조금 전 팀장의 표정을

번갈아 떠올리고 있었다.





24화 - 자각



같은 시각.

주차장에 앉은 이대리는

시동을 켜지 못한 채

휴대폰 화면을 켜고 있었다.


검색창에 떠오른 이름.


‘강ㅇㅇ’


그는 한번 더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팀장님에게 뭔가 일어나고 있다.

아인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더 있다..’



-



출간을 기점으로

그 사람의 이름이 도처에서 오르내렸다.

나에겐 고역이었지만

최대한 조망하려 애썼다.


방으로 들어와 커피를 책상에 올려놓은 뒤 모니터를 켰다.

업무 특성상 그날의 경제 관련 헤드라인과 기사들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사회면을 클릭하고 있었다.

뭔가를 쫓듯이.

머리와 몸이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있다.


‘강ㅇㅇ, 자서전 출간’

‘타인을 위한 삶, 강ㅇㅇ’

‘이 시대의 등불 같은….’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 기사들.

나는 왜 계속 보고 있는 걸까.

그 끝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작은 새는 나뿐이었을까.

어딘가에 나만큼 짓밟혔을 사연을

나는,

찾고 싶었을까.


…….

정말 이렇게,

모두가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고…?



벽난로가에 앉아서

담요를 덮고,

따뜻한 코코아를 건네받고

추위를 녹이기엔 충분한 곳에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아릴 듯이 차가웠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어지러운 오전을 보내고

점심으로 갈비탕을 꾸역꾸역 먹은 뒤,

직원들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검정 옷에 묻은 희끗한 먼지나

흰 옷에 튀긴 빨간 양념처럼

한번 눈에 들어온 얼룩은

시선이 돌아올 때마다 밟히기 마련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까지 크게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최대한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자각하며 발을 내딛지만,

말도 안 되는 무의식에 이끌려 벽 쪽을 보게 됐다.


그런데…


‘포스터가 없다.’


무슨 일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며 사방의 벽을 확인했다.

어디에도 없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다행히도,

그 얼굴이 이제는 벽에 없었다.


출판사 안으로 자연스레 눈이 갔다.

부산스럽게 각자 열중하는 모습들.

모니터를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최지안 실장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유리문에 붙은 방향을 바꾼 포스터가 보인다.


밖에서는 자세히 봐야만 형체를 알 수 있는,

며칠 전 붙어있던 그 포스터.


‘…. 아..’


다시 최지안 실장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단단한 외면 뒤에 가려진 배려를 느꼈다면,

나의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

외로운 조망이 아니었다.


생각이 깊어지려 할 때마다

라일락이 눈앞에 나타나줬고,

이대리 또한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감사한 일상이었다.


사람에게 지친 내가,

사람으로 덜어지고 있었다.


그 시절 이후로 나도 모르게 스쳐간

수많은 선의와 호의가 존재했을 거였다.

아픔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을 뿐.


한 계절이 다른 계절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도 알 수 없을 만큼,

내 안에 많은 것이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25화 - 예리한 종이



앙상했던 가지에서 봄이 만개하고 있었다.

주말마다 꽃구경을 가는 차들로 도로는 꽉 막혔고

와이셔츠 팔을 걷어 올릴 만큼 낮기온이 올라가기도 했다.


몰입에서 벗어날 좋은 방법은

또 다른 것에 대한 몰입이었다.


안 그래도 일밖에 모르던 상사였는데,

올해 초반엔 더 욕심을 부렸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그들의 표정을 살피게 됐다는 것.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

누구게요?”


세면대에서 나란히 양치를 하던 이대리가 물었다.


하마터면 ‘쿡’ 하고 웃을 뻔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떠올리며 속으로만 웃었다.


“네? 누구게요?”


집요하게 또 묻는다.


거품을 다 행군 후, 칫솔을 털며 대답했다.


“너.”


“에?!?!?!?”


씩 하고 웃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뒤에서 황당함이 섞인 웃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향하려는 그때.


“야! 이거 담당자가 누구야?!

니들은 책만 찍어서 많이 팔리면 다냐???”


귀를 찌를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종이가 찢기고

책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출판사 문 앞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폭언을 내지르는 사람과

그 뒤로 핸드폰을 들어 촬영하는 사람들과,

황급히 기록하는 사람들.

곧이어 출판사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서 중재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 그렇게 쓸 사람이 없어서

이런 거지 같은 새끼를 올려! 올리긴!”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해 조사한 후에, 출간을 합니다.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셔서 이야기하시죠.”


“최선?

그 최선을 다했다는 담당자 어디 있어!!!

당장 나와!!! “


난처한 얼굴의 최지안 실장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놀란 것 같진 않았지만,

평소의 단단함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폭언자가 최지안 실장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들고 있던 포스터와 프린트된 종이를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던졌다.

구역질이 올라왔던 그 포스터.


아무리 얇은 종이라도

예리한 면이 있어

잘못 맞으면 베일 수 있다.


어느새 내 뒤를 쫓아온 이대리도

같은 상황을 보는 중이었다.


관객이 늘어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언자는 흩날리는 종이를 잡아채서

최지안 실장에게 던지고 또 던졌다.


내가 찾던 작은 새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모습이면 안 됐다.


주먹이 쥐어지고 있었다.

성큼성큼 그쪽으로 내 발이 옮겨지고 있었다.

뒤에서 이대리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최지안 실장의 표정이 비장해지고 있었다.

뭔가를 말하려 닫혀있던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먼저 종이를 붙든 그 팔을 움켜잡았다.

분노에 눈이 먼 얼굴이 나를 향했다.

어쩌면,

내 속에 오랫동안 웅크려있었을 얼굴.


최지안 실장을 비롯한

그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며 나를 바라봤다.


“당신 뭐야! 이거 안 놔??”


세차게 뿌리치려는 팔을

다시 한번 꽉 잡은 채 말했다.


“눈앞에 사람 보세요.

눈이 멀면 그 사람과 다를게 뭡니까!”


이곳에서 이토록 소리를 내본 적은 처음이었다.

정작 질러야 할 때 나오지 못한 소리는,

오래전 그날의 공기 속에

그대로 묶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고함에 폭언자의 눈이 흔들렸다.

한 발 물러서던 그는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저 인간 때문에..

내 동생이...”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울분으로 흔들리는 등을

가만히 다독이고 있었지만,

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잠시 멍해지려는 나를,

뒤에서 누군가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리세요.

벌써 힘 빼지 마시고.”


이대리의 손에 이끌린 나는,

사람들로부터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다.




26화 - 기억의 두 얼굴



요란한 풍경이 지나가고

그날의 소동을 기록한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는 가지를 치고 또 치며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어쩌면

오랫동안 염원했던 장면이

내 손 하나 닿지 않고 완성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모래처럼 서걱거릴까.



파란 대문에서 걸어 나오던 마지막 날.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그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 진심 어린 인사 앞에서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몰랐던 사람을 원망하는 일과

침묵하는 나를 탓하는 일 사이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졌다.


파란 대문은,

나의 부모에게는 친절의 기억으로,

나에겐 숨을 죽여야 했던 시간으로 남았다.

같은 장면이

이토록 다르게 찍힐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침묵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틈을 만들고,

그 틈마다 다른 기억들이 자라났다.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는데.

모든 걸 쏟아내고

아버지의 분노에 기대어

내 편이 되어달라고 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는데.


뛰어오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발판이 이미 금이 가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원망은 그렇게

뿌리가 아니라,

균열로 남았다.


누가 알았어야 했는지,

누가 몰랐는지,

그 질문은 이제 아무 힘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의 자물쇠를 굳게 걸어 잠갔다.




내 앞에 와서 앉는 라일락.

그녀가 의자를 꺼내는 소리에

나는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토요일 오후,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


아픈 과거 속을 헤매던 나를

지금으로 데려오는 사람.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엔,

잠그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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