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걷기

by 이유하


27화 - 오케이, 빠이.



“아팠다고 보여주고 싶은데

상대가 더 아플까 봐 못 보여주겠어요.

모르는 걸 알려주고 싶은데

악몽이 상대에게 옮겨갈까 봐 말을 못 하겠어요.”


나를 만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인의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려운 나의 말들을,

다정하게 받아주던 그녀에게

나는 천천히,

나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내밀고 있었다.


“음..

슬프면 울면 돼요.

난 울고 나면 좀 가벼워지거든요.

나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때 내가 빠졌던 곳은

얕은 호수가 아니라 깊은 바다였다고.

그때,

내가 얼마나 많은 파도에 휩쓸렸고

얼마나 바닷물이 차가웠는지

정신을 몇 번이나 잃었는지도..


하지만,

차마 망설였던 이야기의 서론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말했어요.


‘다 지난 일이잖냐..

이젠 내려놓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가 나의 상처를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상처가 끝났다는 확신을 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웃기죠.

그런 건 강요로 되는 게 아닌데.

상처를 결정하는 건 난데. “


내 말에 조용히 귀 기울이던 그녀의 눈가가 붉게 변해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를 가만히 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한참 바라봤다.


촉촉해진 눈이 다시 커피잔을 잡고 있는 내 왼손으로 옮겨졌다.

금방이라도 그 커다란 눈에서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 말아요, 용서. “


.....??


괜찮다고.

노력하면 될 거라고.

바람직한 조언들을

그녀만의 다정함으로 펼쳐놓을 거라 생각했었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대답이었지만,

왜, 속에 탄산을 부어댄 것처럼

짜릿한 기분이 들었을까.


“빌어먹을 해피엔딩.

동의 없는 해피엔딩은 폭력이에요.


팀장님은 계속해서 지구에서 살아나가요.

어느 날 갑자기 침공한 외계인.

애초에 우리 별엔 그들을 이해시킬 언어도 없어요.

그러니 다시 보내버려요.

오케이. 빠이. “


작은 손을 세게 뿌리치는 동작을 하는 라일락.


단단하지만 귀여운 그녀의 위로에

나는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내 큰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오케이.”


“빠이.”





28화 - 친애하는 나의 어른



주말 지난 월요일 아침.

초록불이 기다렸다는 듯 켜지는 출근길.

평소보다 일찍 주차장에 들어섰다.


늘 하던 곳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제저녁 자려고 누웠을 때.

이대리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내일 점심은 제가 준비한 곳으로.’


.. 뭐야.

또 무슨 꿍꿍이람.


피식 웃으며 답장은 생략했다.

대답이 뭐 필요한가.

기대를 안고 출근하면 될 일.


어쨌든,

그 문자 한 통에

오전 업무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덮으며

직원들이 올린 기획서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똑똑”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최지안 실장.


‘…아..’


“안녕하세요.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안 그래도 그날 이후로 궁금했었다.

아니,

걱정이 됐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그럼요.

여기 앉으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탁자 앞 소파로 최실장을 안내했다.


“차 드실래요?”


“아뇨. 마셨어요. 고맙습니다.”


예전보다 간결해진 말투.


서먹함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말을 꺼내는 최실장.


“우선, 그날은.

감사했어요.


그리고..

..

제가 오만했어요.

늘 그래왔듯이,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읽어낸 시간이 이십여 년인데.

팀장님의 사연을 다 알 수 없지만,


.. 미안합니다.”


최실장의 고개가 낮아진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최실장의 당당함이 좋았었다.

내가 느꼈을 때,

내 주변의 어느 누구보다

진짜 어른이라고 여긴 사람이었다.


나에게 사과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고마워할 사람은

최실장이 아닌 나였으니까.


“실장님.”


낮아진 나의 음성에 최실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장님을 알아서 참 좋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탈을 쓰고 달려오는 사람의 민낯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예전에 저한테 그러셨죠.

편견도, 기억도, 시선도

다듬어보라고요.


실장님도,

끝난 게 아니에요.

다시 다듬으면 돼요.”


최실장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의 나처럼.


올라갔던 어깨가 한결 편안해진 최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에 대한 제 시선은 틀리지 않았네요.”


칭찬은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 말이 참 달았다.


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하필 이 회사의,

이 층에서 근무하게 된 것도,

하필 이 층에 출판사가 자리한 것도,

하필 부탁을 한 이가 라일락인 것도,

하필 최지안 실장인 것도.


우연처럼 보이는 일상의 조각들이

과거의 시간에 대한 위로로 내게 왔을까.



문득 이 순간 스치는 얼굴 하나.


열여덟 살 쯤이었을까.

오후 수업을 멋대로 박차고 나와서

만화방으로 출석했던 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아저씨가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점심은 먹고 온 거냐.”


“네.”


아저씨의 눈을 피한채 만화책을 넘기며 대답했다.


“수업은 끝까지 듣고 와.

다음부터는 이 시간에 오면 문 안 열어줄 거야.”


“……”


“인생도 수업이랑 비슷해.

끝까지 가봐야 해.

궁금하지 않아도, 기대되지 않아도.

가봐야 알 수 있는 거야.”


그땐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애정 어린 아저씨의 말들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29화 - 계속해서 걷기



나는, 사건의 중심과는 먼 곳에서

종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뿐이었다.


매일 하나씩 날 선 제보가 오르내렸다.

불을 때지 않은 곳에 그을음이 생길 수 없듯,

그가 남긴 흔적은 생각보다 깊었다.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말 내가 아무렇지 않았을지.


출간된 책은 회수되었고

이미 팔린 책은 훼손되거나 버려지기도 했다.

형벌이란 누구에게나 무겁다.


손가락 터치 하나에

세상 곳곳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시대였다.

피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소식에

가끔 멀미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탄 배는

폭풍우를 뚫고

묵묵히 나아가는 걸 그치지 않았다.



“퇴근 후 치맥 어때요?”


퇴근 한 시간 전에 날아든 이대리의 문자.


마침 특별한 약속도 없었고

문자가 반가웠기도 했고


”오케이. “


잠시 후, 퇴근 준비를 마친 이대리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팀장님, 저 건너편에 세탁소 좀 갔다가 바로 갈게요. “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리를 정리하려 일어났다.


그런데 이대리가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왜?”


“음...

괜찮으세요?”


잠깐의 망설임.

나는 웃었다.


"그럼. 지금은 치킨 생각뿐인걸. “


이대리가 그제야 따라 웃으며 문을 닫았다.



조금 전,

라일락에게 이대리랑 한잔 하기로 했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바쁜가..?’


건물을 빠져나와 치킨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요일 저녁답게

거리의 소음이 가게 안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대리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빈자리를 찾으려던 그때.

내 시력이 나빠진 게 아니라면,

생각지도 못한 그곳에

라일락이 앉아있는 건.

현실이 맞다.


이대리를 생각하고 온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작은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촛불이 조용히 흔들렸다.


“생일 축하해요.”


행복해서, 벅차서

심장이 터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나보다 더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계속 걸어와 줬으니까요. “


가게 밖 가로등 불빛 밑으로

가을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시간은 많은 걸 덮어줬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리고 가장 고마운 건,

어김없이 내 곁에 사람을 머물게 한다는 거였다.




30화 에필로그 - 작은 새



아침부터 뜨거운 햇살이 나를 깨웠다.

열린 방문 틈 사이로

꺅~~

까르르까르르

작고 소중한 소리들이 들어온다.

귀가 간지럽다.


잠시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한다.

한참 눈을 감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 무렵,


“뭐야아~~

일어났잖아~~

다 알아~~”


우다다다다

우렁찬 발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소중한 나의,

작은 새.


“앗! 들켰다!”


자꾸만 놀리고 싶어지는 얼굴.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아이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는 나.


“일어나아~~”


‘촤아악‘


작은 손에서 나온 야무진 힘이

내게서 이불을 빼앗아 갔다.


“비행기 태워줘~~ 비행기~~!!”


아이는 자기 몸집보다 커다란 내 두 다리를 하늘로 올려

발바닥 위에 통통하고 귀여운 배를 갖다 댔다.


작은 두 손을 꽉 잡은 채

배에는 힘을 단단히 주고,

대신 이륙과 착륙은 구름처럼 부드럽게.


실컷 비행기를 탄 아이가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아빠!

아빠는 어렸을 때,

커서 뭐가 되고 싶었어?”


어떤 어른에게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까.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해 주는 딸에게

이 순간,

얼마나 고마운지.


눈물이 나오려고 또 눈이 간지럽다.

딸이 내게 온 뒤로

내 안에 모든 감정도 다시 태어났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기보다,

많이 튼튼해지고 싶었던 것 같아.

많이 강해지고 싶었어.


그래서..

누군가를 꼭 지켜주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었어.”


아이가 입을 크게 벌려 환하게 웃는다.

라일락을 닮은 눈도 같이 웃는다.


“슈퍼 히어로 말이야!!??

지구를 지켜줄 거야????”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대답했다.


“아니.

너하고 엄마.”


까르르 웃으며

나를 끌어안아주는 아이.


“밥 먹자!!!!”


밖에서 우리 둘을 부르는 목소리.



지지리 운이 없던 작은 소년은

어느새 아침 햇살에 눈을 뜨는 어른이 되었다.


계속 걸어온 사람에게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이 이야기가,

당신의 걸음 곁에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끝.

(연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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