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즉 고 (2)

삶이라는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by 임준열

글을 읽기 전에 아래 글을 먼저 읽고 오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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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는 불교에서의 고통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생즉고 고즉생의 의미를 파악하여, 삶이 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고통스러운 삶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써 내려간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삶에서 배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감정이라는 낙차를 점점 줄여나가서, 결국 고통과 기쁨을 초월하는 것으로

삶의 고통을 떨쳐내고, 고와 락의 무차별 상태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가 투자자라고 상정하고 이것을 생각해 보자면,

이번엔 주식을 아예 하지 않고 저축만 하는 것으로 비유를 할 수 있겠다.

주식시장에 아예 들어가질 않으니, 낙차도 존재하지 않고 평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체의 낙차가 없기에 고통과 기쁨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개 인간인 나와 우리에겐 도달하기 너무 높은 비현실적인 단계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같은 듯 다른 새로운 사상으로 삶의 고통을 바라보려 한다.


알베르 카뮈는 진실로 심각한 첫 번째 철학적 논의점은 자살의 문제라고 보았다.

인간은 언젠가 삶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 부조리성을 가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또한, 카뮈의 저서인 "시즈프 신화"에서는 인간을 시즈프에 비유하며,

의미 없는 삶에서 노동이라는 고통을 무한히 겪어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부조리함을 깨달은 우리 인간들은 3가지의 반응을 한다.

첫 번째로 부조리한 삶을 포기하는 "자살"

두 번째로 부조리함을 덮고, 회피하는 "철학적 자살"

마지막 세 번째, 부조리함을 직면하고 그럼에도 살아가려 하는 "반항"

이것들이 그 반응들이다.


우리는 카뮈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각설하고 세 번째 반응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자

부조리함에 반항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함이 아니다.

삶이라는 것이 애초에 합리성과 동떨어져 있음을 인지하고, 이 부조리함을 받아들인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뮈는 반항의 태도 자체가 비극적 결말을 전제한다고 한다.


점점 머리가 아파온다.

삶은 고통이라더니

그 고통을 없앨 수도 없고,

이제는 그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만한다고?

인간이란 정말 이토록 비극적인가?

하지만 카뮈는 이 비극적 결말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부조리한 세계는 인간을 객체로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반항함으로써 세계가 앗아간 주체성을 회복한다.

다시 말해 반항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를 얻고 나면 우리는 삶에 쫓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탐색하게 된다.

이를 통해 열정이라는 숭고한 가치 또한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경기장에서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거대한 부조리와 맞붙으며 살아간다.

그러하더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반항과 자유, 열정을 통해서 우리는 패배자일지언정 삶의 낙오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우리가 부조리한 삶에 대항해야 하는 방식에 대해서 알아보았지만, 여전히 왜 대항해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냥 부조리한 세상에 적응하고 사는 것이 덜 피곤하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 우리가 왜 주체적인 삶을 되찾아야 하고, 추가적으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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